바나나 팬케이크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홍콩을 거쳐 기차로 광저우까지, 최종 목적지는 중국 윈난성 리장 시의 옥룡설산이었다. 마치 푸른색 물감을 물에 푼 듯 그림 같은 강 뒤로 보이는 설산의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게다가 밤하늘은 빼곡하게 펼쳐진 별들의 향연이라는 말에 이십 대 초반이던 나와 두 명의 친구는 무작정 여행을 결심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나 나오는 쏟아지는 별들을 실제로 보는 건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젊은 날의 패기였을까, 정보 검색을 소홀히 한 탓에 여행은 파란만장했다. 마카오의 카지노에서는 돈을 잃고, 홍콩에서는 핸드폰을 잃고, 광저우에서는 기차표마저 잃어버렸다.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묵게 된 오천 원짜리 숙소는 난방이 되지 않아 덜덜 떨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꾀죄죄해진 우리의 행색은 관광객이 질 법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음에도 현지인들의 호객 행위조차 받지 못할 지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리장 시에 도착해, 오전 7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는 정상이 아닌, 산 중턱에 위치한 숙소였다. 이른 시간이라 등산객은 열 명이 채 안 될 만큼 한산했다. 마냥 새로운 모험이 시작된 기분에 들떠있던 우리는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하며 감상을 쏟아냈다. 저 멀리서 산 양이 걸어가는 걸 발견했을 때는 마치 EBS『세계테마기행』프로그램 속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감탄도 잠시, 흙길이 시작되자 비로소 진짜 산행이 시작됨을 느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 대화는 사라지고 등산객도 보이지 않았다. 험난해지는 산길, 성인 상체만 한 바위 계단을 오르자 다리가 자기 멋대로 후들거렸다. 스쿼트를 멈추지 않고 하는 느낌이었다. 난간 하나 없는 낭떠러지 옆 좁은 길을 걷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을 때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장이 쿵 하고 발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었다. 이 험난한 산에 러닝화를 신고 온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산신령께 무사히 도착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점점 발걸음은 느려지고, ‘쉬어가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바위 코스가 끝없이 반복됐다. 어느새 나는 꼴찌로 뒤처졌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짊어진 배낭을 당장이라도 내팽개치고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지 못하면 정말 끝장이었다. 우리의 거친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핸드폰도 제대로 터지지 않는 이곳에서 밤을 맞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건 산짐승의 날카로운 눈빛뿐일 것이다. 아까 지나쳤던 길가에 앙상한 산양의 사체가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친구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그들이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야속하게 느껴졌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모습에 서운함마저 들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며 위를 올려다봤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내가 이 고생을 자처하게 된 걸까. 스스로를 원망하고, 평소에 체력 단련을 게을리했던 지난날의 나를 탓하고, 앞서가는 친구들이 얄미웠다.
산을 오른 지 5시간쯤 됐을까. 고된 산행이 수행이 된 건지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마음속에서 뒤엉켜 있던 감정들이 하나둘 정리되고, 해야 할 일만 또렷이 떠올랐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건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잠깐의 원동력이 될지는 몰라도, 결국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느려도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이어가자.’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신기하게도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내가 선두에 서 있었다. 그때 느꼈던 뿌듯함은 남을 이겼다는 승리감과는 전혀 다른, 내 힘으로 이뤄낸 성취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드디어 바위 능선을 모두 오르자, 호랑이가 뛰어놀았다는 전설의 협곡, 호도협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숙소가 멀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몸을 식혀주었고,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그곳에서 마신 물 한 모금은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갔다. 땀으로 흠뻑 젖은 배낭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는 순간, 온종일 억지로 버티고 있던 다리마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곧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고, 곧장 숙소 내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는 굶주린 맹수처럼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없이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식탁은 무려 여섯 가지 요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메뉴는 바로 바나나 팬케이크였다.
메뉴판에서 그 이름을 발견한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온통 달콤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갓 구운 따끈한 팬케이크 위에, 노란 바나나 슬라이스가 촘촘하게 얹혀 있는 환상적인 비주얼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마주한 팬케이크는, 바나나 슬라이스 대신 바나나를 통째로 갈아 넣어 반죽한 다소 투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망도 잠시,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순간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탄수화물이 채워지며 그날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쓸어 담듯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들은 말끔히 비워졌다.
어느덧 밤이 깊어질 무렵,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가 밤하늘을 가득 채운 채 누웠다. 온종일 땀과 흙먼지에 찌든 몸이었지만,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만큼 마음은 평화로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점점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갔고, 별들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은 셀 수 없이 많은 별로 가득 채워졌다. 그날 밤 내 눈앞에 쏟아지던 별빛은 상상해 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