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오아시스

카푸치노

by 작심

누군가 내게 타이베이에 다시 갈 이유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음료’라 말하겠다. 푹푹 찌는 날씨 덕분일까? 타이베이 곳곳에는 버블티, 커피, 위스키 등 더위에 지친 여행자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는 오아시스 같은 공간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타이베이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오후 2시 출발이었다. 떠나기 전, 커피를 한 잔이라도 더 마시고 가기 위해 무거워진 배낭을 둘러메고 자전거 대여소로 향했다. 3일 동안 자전거로 누빈 덕분에, 이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는 바리스타 챔피언이 운영하는 카페. 커피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챔피언 타이틀이 붙은 곳이라면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하얀 셔츠에 베레모, 앞치마를 두른 직원이 문 앞에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매장 가운데에는 커피를 만드는 공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오픈형 구조였다.


“What is the famous menu?”

(가장 유명한 메뉴는 뭐예요?)


“Here, Iced Cappuccino.”

(여기서는 아이스 카푸치노가 유명해요.)


아이스 카푸치노가 가장 유명하다는 직원의 말에 고민 없이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리스타들의 손놀림을 구경했다. 저울로 원두 무게를 정확히 측정하고, 물의 온도를 섬세하게 맞추고, 커피 추출 시간을 초 단위로 체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티스푼으로 맛까지 보는 정성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챔피언 바리스타의 가게는 다르구나.’


“Number 267, Iced Cappuccino!”

(267번, 아이스 카푸치노 나왔습니다!)


가게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아이스 카푸치노를 소중히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카푸치노를 한 입 마시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사뿐히 내려앉은 우유 거품은 마치 크림처럼 조밀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크림처럼 무겁지 않고, 일반 거품처럼 가볍지도 않았다. 실크처럼 매끄럽게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촉감이 황홀했다. 거품을 따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그야말로 지금까지 마셔본 카푸치노 중 단연 최고였다. 고소함과 향긋함, 씁쓸함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감쌌다. 세 가지 맛이 혀 끝에서 부드럽게 춤을 추는 듯했다. 에스프레소와 우유의 배합 비율 또한 절묘했다. 단순히 커피와 우유가 섞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완성된 음료로 태어난 듯했다. 그야말로 ‘적절함의 미학’을 제대로 구현한 맛이었다. 이 정도면 가히 내 인생 커피라고 칭할 만했다.


원래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다른 카페는 무슨, 여기서 한 잔 더 마셔야겠다! 커피양이 줄어드는 게 아쉬워 멈추고 싶었지만, 이미 내 손은 쉴 새 없이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카페에 온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커피를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One Iced Cappuccino, please!”

(아이스 카푸치노 한 잔 더 주세요!)


나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맛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서둘러 메모장을 켰다. 혼자만의 커피 칼럼을 끄적이는 사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Number 294, Iced Cappuccino!”

(294번, 아이스 카푸치노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커피를 음미했다. 오롯이 미각과 후각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캬, 좋다...”

처음 마셨을 때만큼 강렬한 도파민이 분출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감동적인 맛이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느라 지쳐있던 어깨의 피로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잘 마셨다는 인사를 건네고 카페 문을 나섰다.


그날 밤, 귀국한 후에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입안에 맴도는 커피의 여운 때문인지, 아니면 과도한 카페인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실크처럼 부드러운 거품과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하는 그 맛이 자꾸만 떠올랐다. 인생 커피를 만나는 대가로 불면의 밤을 치렀구나. 그 생각에 피곤한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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