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얼굴

우육면

by 작심

한밤중,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2만 원대? 미쳤다… 질러버려?”

인천-대만 타이베이 왕복 항공권 가격이 놀랍게도 12만 원대. 출발일은 3일 뒤였다. 해외여행을 이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해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백수 2년 차. 회사 다닐 때 모아둔 돈으로 버티는 중이라 여유도 없었다. 갈까, 말까. 고민에 빠졌을 때 문득 SNS에서 봤던 글이 떠올랐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최종훈 교수


지금 나는 ‘갈까 말까’ 하고 있다. 그러니 가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항공권을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니, 사지 말라는 뜻일까? 결국 서울대 교수님도 내 딜레마를 해결해 주진 못했다. 망설이다가 다시 항공권 페이지에 접속했는데, 이럴 수가. 3만 원이 올랐다. ‘초특가’를 놓쳤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새로고침을 반복한 끝에 내가 결제한 최종 금액은 13만 원. 고도의 마케팅 전략에 놀아난 기분도 들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가격이었다. 3일 뒤, 나는 대만으로 떠난다.


비행기는 아침 8시에 출발해 타이베이에 제시간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타이베이 공항을 빠져나왔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글자만 가득한 걸 보니 여행 온 실감이 났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가 위치한 시내에 도착했다. 역사를 나오자마자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마주하자 감탄이 터졌다. 그러나 벌어진 입을 다물기도 전에 습한 공기가 내 몸에 달라붙는다. 이거구나. 대만의 여름.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곧장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지도 앱을 켜서 근처 맛집을 검색하니 평점이 높은 우육면 가게가 눈에 띄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한 가게 앞으로 한국인 무리가 우르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저기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번역기를 켜서 “한 명이예요”라는 문장을 들려드리자, 아주머니는 입구 근처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가게 안에는 여러 개의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벽에는 오래된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었고, 몇몇 관광객들은 손풍기를 켠 채로 우육면을 먹고 있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 옆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이 우육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벽에 붙은 메뉴판을 힐끗 보다가, 가장 첫 번째 메뉴를 가리키며 더듬거리는 발음으로 말했다.


“워 야오 쩌꺼. 我要這個” (이거 하나 주세요.)

잠시 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육면이 내 앞에 놓였다. 맑은 갈색 국물에, 쫄깃해 보이는 우동 면발, 큼직하게 썰어 넣은 소고기 사태, 그리고 신선한 쪽파가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작은 수저가 꽂힌 스테인리스 양념통들이 놓여 있었는데, 한국의 해장국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과 똑같았다. 옆자리 아저씨가 익숙한 듯 양념통 하나를 집어 들어 우육면 위에 다진 양념을 툭툭 뿌렸다. 나는 힐끗거리며 그 모습을 유심히 훔쳐보다가, 아저씨가 다시 제자리에 놓은 양념통을 슬쩍 가져왔다. 그러자 아저씨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손짓했다. 다른 양념통과 우육면을 번갈아 가리키더니, 국물 위에서 손을 휘휘 젓고는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도 섞어서 먹으면 맛있다’라는 뜻인 것 같았다.


“쎼쎼. 謝謝 ” (고맙습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아저씨가 가리킨 양념통에서 다진 양념을 조금 덜어내 종지에 담았다. 톡톡 터지는 날치알 같은 알갱이가 들어있는 양념이었다. 도대체 무슨 맛일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양념을 그대로 맛보려 하자, 옆자리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냥 먹으면 안 된다’라는 뜻인 것만은 분명했다. 아저씨는 다시 한번 국물에 섞으라는 손짓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웃으며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순댓국집에 온 외국인이 다진 양념을 그대로 퍼먹으려고 하면, 나라도 깜짝 놀라 말렸겠지.


우선 아무것도 넣지 않은 맑은 국물부터 한 숟가락 떠 맛보았다. 은은하면서도 낯선 향신료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진한 고깃국물 맛이 혀를 부드럽게 감쌌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알려준 다진 양념을 국물에 풀어 맛을 보았다. 와, 풍미가 훨씬 다채로워졌다. 아까 그냥 먹었을 때도 충분히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양념을 넣으니 완전히 다른 음식 같이 느껴졌다.


“하오-츠! 很好吃!”(맛있어요!)

나는 감탄하며 아저씨에게 따봉을 날려주었다. 아저씨는 뿌듯한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다. 이번에는 큼지막한 고기 한 점을 집어 맛을 보았다. 진한 국물이 깊숙이 배어 있어 입안에서 살살 녹는 듯 부드러웠다. 정말이지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는 맛이었다. 아, 큰 사이즈로 시키지 않은 게 후회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니, 묘하게도 내가 앉아 있던 자리의 공기가 아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낯선 도시, 낯선 식당, 낯선 음식인데도, 어쩐지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감돌았다. 낯선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옆 테이블 아저씨 덕분일까. 그 따뜻함이 마치 도시 전체의 온기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래, 타이베이는 내게 그런 도시였다. 사람 냄새가 나는 정겨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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