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나는 법

붕어빵과 팥칼국수

by 작심

나는 겨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저녁 6시가 되기도 전에 해가 저물고, 하늘은 잿빛이 된다. 추위에 몸은 움츠러들고, 두꺼운 옷에 파묻혀 걸어가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겨우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이불 속에 파묻히면, 이대로 겨울잠이라도 자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고 막상 주말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소중한 청춘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겨울은 내 안의 두가지 생각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피로한 계절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때면 어김없이 스며드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따뜻한 겨울 별미들이다. 겨울 추위를 뚫고 나가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이유기도 하다.


붕어빵

“팥 붕어빵 4천 원어치 주세요.”

내게 붕어빵은 무조건 팥이다. 슈크림이나 고구마 앙금도 붕어빵의 한 종류로 인정하지만, 팥 앙금이야말로 붕어빵의 정수라고 굳게 믿는다. 매서운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반팔 차림으로 붕어빵을 굽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달인의 경지에 오른 듯 능숙하고 빠르다. 붕어빵이 노릇하게 구워지는 모습을 넋 놓고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내 뒤로는 붕어빵을 사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드디어 따끈따끈한 붕어빵 봉투가 내 손에 쥐어졌다. 소중하게 받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꼬리부터 한 입 베어 물었다.

“앗, 뜨거!”

해마다 봄이면 피어나는 벚꽃을 처음 본 마냥 감탄하는 것처럼, 해마다 오는 겨울엔 붕어빵 팥 앙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매번 까먹는다. 하지만 이 뜨거움이야말로 갓 구운 붕어빵의 매력 아닐까. 겨울 추위 속에서 맛보는 뜨겁고 달콤한 한 입은 포기할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다.



팥칼국수

엄마와 나는 겨울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칼국수집에 갔다. 엄마는 달콤한 팥칼국수를, 나는 얼큰한 바지락 칼국수를 시키곤 했다. 팥칼국수도 맛있지만 내 몫으로 시킬만큼 매력적이진 않았다. 팥칼국수보다는 동그란 새알심이 든 팥죽이 더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팥칼국수의 매력을 알아버린 게.


팥의 첫인상을 떠올려보면, 콩의 친척 쯤 되는 것처럼 생긴 것이 썩 호감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단팥빵, 찐빵처럼 모양을 바꾸고 설탕을 듬뿍 친 후에야 팥과 친해질 수 있었다. 팥죽도 마찬가지였는데, 설탕을 들이붓고 나서야 흡족해하며 먹었다. 말랑말랑한 젤리같은 식감을 좋아하기에 팥죽의 새알심엔 금방 익숙해졌지만, 팥죽에 손칼국수면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감기에 걸렸던 날이었다. 따뜻한 음식으로 몸을 든든하게 채우고 싶었다. 바지락 칼국수의 맑고 시원한 황태 국물보다, 밀도 높은 팥칼국수의 묵직한 국물이 당겼다. 내 몫으로 팥칼국수를 주문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작은 옹기그릇에 김이 나는 팥칼국수가 나왔다. 설탕을 넣지 않은 팥칼국수의 맛을 봤다. 팥의 맛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담백하다, 구수하다 모두 팥의 맛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그나마 비슷한 단어를 하나 찾았다.


‘달곰쌉쌀하다: 조금 달면서 약간 쓴 맛이 있다.’


달콤이 아니다. 달‘곰’이다. 약간의 쓴 맛이 있는데, ‘쓴 맛’이라고 하기 애매할 만큼 은근한 씁쓸함이다. 팥 고유의 단맛은 크지 않은데, 설탕을 넣는 순간 극대화되듯 커진다. 테이블 위에 놓인 스테인리스 통에서 설탕을 듬뿍 떠내 팥 국물에 휘젓는다. 씁쓸함이 날아가지 않을 정도로만 달아야 한다. 더 이상 단 음식은 식사가 아니라 디저트라는 게 나의 음식 철학이다. 몇 번이고 간을 보며 설탕의 농도를 맞춘 후에야 설탕 통 뚜껑을 닫는다. 팥칼국수는 가게에서 직접 손으로 쳐서 만든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면발이라야 제 맛이다. 바지락 칼국수를 먹을 땐 뜨거워도 허겁지겁 먹게 되지만, 팥칼국수는 뜨거운 팥죽 국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게 된다. 마치 검붉은 용암처럼 뜨거운 팥죽 국물에 담긴 면을 앞접시에 덜어 후후 불어 식힌 뒤, 조심스럽게 맛을 음미했다. 울퉁불퉁한 면발을 우물거릴 때면, 왠지 한 장면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투박한 손이 나무 도마 위에서 밀가루 반죽을 탕탕 치대고, 고물 같아 보일 만큼 낡고 오래되어 보이지만 날이 잘 썬 칼로 면발을 툭툭 끊어내어 팥죽이 펄펄 끓고 있는 커다란 가마솥에 도마째로 면발을 넣는 장면. 어쩌면 TV에서 스쳐 지나간 장면일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 속에선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다.


옹기 그릇에 담아주는 것도 썩 어울리는 모양새다. 미술관에서 그림에 어울리는 액자를 선택하듯이, 이 옹기그릇도 내용과 딱 맞는 짝꿍처럼 어울린다. 팥칼국수를 앞에 두고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먹다 보니 어느새 그릇의 바닥이 보인다. 나는 팥죽 국물을 싹싹 긁어먹는다.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온다. 온몸을 잔뜩 움츠린 채 들어오던 아까와 달리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걷는다. 배가 따뜻하니 온몸이 따뜻해졌다. 이틀 뒤, 신기하게도 감기가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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