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그녀의 손길을 기억하며

by 강수린

마른바람이 골목을 스치던 수년 전 겨울, 나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재혼과 동시에 닥쳐온 남편의 사업실패, 그리고 도박과 야반도주라는 모진 소문은 한순간에 내 삶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흩어진 가족, 한 달 치 현금, 그리고 대형 캐리어 하나. 만삭의 몸으로 떠나온 낯선 도시는 내게 비바람 몰아치는 절벽 같았습니다.

큰딸과 함께 찾아 들어간 곳은 저렴한 고시원이었습니다. 산후조리원으로 쓰이다 수익 악화로 용도가 바뀐 공간은 낡고 어두웠지만, 따뜻한 맥반석 바닥 덕에 은둔하듯 몸을 눕힐 수 있었습니다. 밥과 김치가 제공되는 최소한의 삶. 창 없는 방 안에서 켜진 전등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은 깊고 쓰디쓴 강물이었습니다.

그 시절,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옥상으로 몸을 숨기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마주치던 주인 할머니의 눈빛조차 처음엔 화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사과 한 봉지를 건네며 “딸 같아서 하는 말인데…”라던 그녀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차갑게 굳어 있던 손을 잡아주던 그 순간, 나는 잊고 지냈던 인간의 온기를 되찾았습니다.

할머니는 내게 엄마였고, 친구였으며, 보호자였습니다. 백발을 단정히 넘긴 모습과 세월의 흔적이 묻은 거친 손마디는 삶의 무게를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그 무게를 견뎌낸 강인함이었습니다. 그녀의 따뜻한 말과 조용한 위로 덕분에,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경제력이 회복되며 고시원을 떠났지만, 그곳은 내 기억 속의 고통과 감사가 겹쳐 있는 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흔적조차 사라진 건물 앞을 지날 때면, 아픈 기억과 함께 고마운 온기가 되살아납니다. 귀촌하신 뒤 소식은 끊겼지만, 내 삶에 공기처럼 스며든 그녀의 따스함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겨울이 올 때마다 나는 할머니를 떠올립니다.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주던 그 한마디, 거친 손으로 내 손을 감싸던 그 순간. 그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온기를 전하며 살고 싶습니다. 할머니, 당신이 보여주신 따뜻함은 제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제 마음을 데워주고 있습니다.


- 따뜻한 마음을 내어주던 당신이 그리운 계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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