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초기 가톨릭 수도원 공동체 미션(missions)
캘리포니아에서 4학년을 보냈거나 보내게 된다면, 아마도 학창시절에서 가장 큰 프로젝트 중 하나로 기억됐거나 기억될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미션(Mission)’ 프로젝트이다. 스페인이 캘리포니아를 지배했을 당시 남겨진 유적인 21개 미션 중 하나를 선택하여 모형을 만드는 것이 이곳 4학년 학생들 가장 큰 사회(Social Study) 숙제이다. 학생들은 미션에 대해 조사해 리포트를 쓰고, 모형을 만들어 보는 과정을 통해 캘리포니아 시작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침략의 역사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지 530년이 다 되어간다. 그는 스페인 페르난도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 후원으로 항해에 나서, 세계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미국은 ‘개척정신’ 표본인 콜럼버스를 기리기 위해 10월 12일을 콜럼버스 데이라는 이름의 공휴일로 정해 놓고 십몇 년 전만 해도 다양한 행사 등을 했었다. 그러나 ‘개척과 도전’ 상징이었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 원래 주인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에 대한 ‘침략과 노획’의 역사로 인식이 달라져 버려, 오늘날에는 그날과 관련된 크고 다양한 행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화에 가속도가 붙게 되었는데, 북미 대륙 동부 지역은 대부분 영국 지배를 받았던 반면, 서부 지역과 중남미 대륙은 스페인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지명 대부분이 스페인어로 된 것이다. 하여간 이런 저런 식민지 시대를 거쳐가면서 캘리포니아에는 여러 유적들이 남게 되었다. 그런 유적들 중에 캘리포니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 ‘미션’이다.
미션, 가톨릭 수도원 공동체
미션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교화하기 위해 스페인에 의해 세워진, 가톨릭 수도원 형식의 공동체이다. 선교 목적이 짙었지만 당시 스페인 군사적 목적 요새로서의 기능도 함께 한 곳이다.
아메리카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본격화 하기 시작한 스페인 군대가 주둔함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스페인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가톨릭 선교를 위해 신부들을 아메리카에 파견하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이었던 후니페로 세라(Juniper Serra) 신부가 1769년 샌디에고에 첫 번째 미션(Mission San Diego de Alcala)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 연안 엘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왕의 도로)을 따라 북상하면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모두 21개 미션이 세워지게 되었다. 아름다운 선율의 주제곡 ‘가브리엘의 오보에’와 거기에 가사를 붙인 ‘넬라 환타지’로 더 유명한 1986년 제작된 영화 <미션>을 보면 가브리엘 신부가 원주민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바로 그것이 미션에 살았던 원주민과 스페인 신부들의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거의 모든 미션 이름이 스페인어에서 남자를 뜻하는 ‘샌(San)’과 여자를 뜻하는 ‘산타(Santa)’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모두 ‘성(聖, Saint) 거룩하다’는 뜻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가톨릭이 전파되다
결론적으로 보면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의 기독교화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자랑스런 결과 뒤에는 참담했던 원주민들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 있다.
전통적인 무속신앙이 생활 자체인 원주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주민 언어를 모르는 신부들이 종교적 개념부터가 다른 그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예를 들어 죄, 은혜, 죄사함, 그리고 구원 등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는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얻으라고 가르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간혹 그들이 교리를 알아 들었을지라도 그때뿐이고 다음 날이면 모두 잊어버리는 일이 계속되었다. 파견된 신부 중 한 명은 ‘그들은 씹고 삼킬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먹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들은 농사를 지어 미래를 위해 곡식 등을 보관한다는 개념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모두 해치웠다. 그리고 어떤 부족은 가족, 이성과 동성, 아이와 어른, 미혼과 기혼 상관없이 성행위를 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신부들은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해 교육했지만 원주민들은 미션에 잠깐씩만 머물다 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들을 교화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후니페로 세라 신부는 ‘먹을 것을 주어 교리를 가르친다’라는 생각으로, ‘2~4주 동안 미션에 살면, 끼니를 해결해 주겠다’는 방식으로 교화를 시도했다. 늘 배고팠던 원주민들은 ‘미션에 가면 먹을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그곳을 찾았는데, 머무는 동안에는 매일 기도하고 교리를 외우는 등, 신부들 말에 순종했지만 다시 미션을 나가면 원래 하던 습관대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곧 모든 내용을 잊어버렸다. 한 곳에서 살며 농사를 짓거나 기타 다른 노동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미션에 잠깐 머물고는 곧 도망쳤다. 신부들은 결국 이런 방식으로 교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물리적인 힘으로 강제 개종을 하게 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원주민을 노예처럼 부리며 가두고 때리고 죽이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신부들은 원주민을 개종시킨 뒤 미션이나 마을(Pueblos) 등 정해진 곳에서 살게 했는데 그들은 음식을 제공받았지만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선교사나 군인들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질병에 의해 인구가 급감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가 사라져 갔으며 결국 원주민 사회가 몰락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 신부는 이렇게 고백했다. “자유롭게 잘 살고 있는 그들을 강제로 공동체 안에 묶어 두자 살이 찌고 병들고 죽었다.”
샌가브리엘 미션(Mission San Gabriel Arcangel)
엘에이에서 동쪽으로 10번 고속도로를 타고 5~6마일 정도 가면 샌가브리엘 밸리라는 지역이 나온다. 이곳에 ‘미션의 여왕(Queen of the Mission)’이라는 별칭의 샌가브리엘 미션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후니페로 세라 신부가 21개 미션 중 네 번째로 세운 곳으로, 그 미션 주위에는 당시 지역 원주민이었던 통바(Tongva)인들과 가브리엘리노(Gabrielino)인들 5000여 명이 주로 사냥과 농업 등을 하면서 살았다. 원래 이 미션은 1771년 9월, 현재 몬테벨로(Montebello) 시에 세워졌었는데 1774년에 있었던 대홍수로 모두 쓸려나가 5마일 정도 북쪽에 위치한 샌가브리엘(San Gabriel) 시로 옮겨 다시 짓게 되었다. 설립 15년이 되었을 때에는 이곳에서 1000명이 함께 생활하였고, 최대한 1700여 명이 생활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신부들은 외부인 접근에 싸울 태세가 단단히 된, 무장한 원주민 무리와 만나게 되었다. 한 신부가 ‘슬픈 성모 마리아(Our Lady of Sorrow)’ 그림을 바닥에 내려 놓자 원주민들은 그 그림을 보고 무기를 내려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그림은 현재 성당 제대 옆에 전시되어 있다.
거의 모든 미션이 그랬듯이 이곳도 모든 경제활동이 자급자족 형태로 운영되었다. 물은 수로를 만들어 끌어와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대부분 미션이 농장을 운영했는데 샌가브리엘 미션은 농장뿐만 아니라 대장간과 직물을 짜는 작업실 등도 운영하였다. 또 미사에 쓸 와인을 얻기 위해 포도밭을 가꾸었는데, 지금은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이 미션 건너편에서 옛 포도원 모습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미션은 캘리포니아 와인 역사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미션 원주민들은 농업과 축산업을 하여 생활하였고 비누나 양초, 바구니, 그릇 등등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었다. 128마리 가축으로 시작된 축산업은 1829년에 최대 규모가 되어 모두 4만 2350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미션이 비슷한 구조로 지어졌는데 미션의 상징인 캄파닐레(Campanile, 종탑), 성당(Church), 숙소, 부엌, 묘지, 등등을 찾아볼 수 있다. 성당은 1791년에서 1805년까지 세워졌고 무어식 건축양식으로, 이 같은 건축물로는 남가주에서는 제일 오래된 건축물이다. 종은 미션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기도시간, 식사시간, 취침시간, 출생 사망 등등 생활 전반의 사건 등을 알리는 도구였다. 1812년 지진으로 3개 종이 달렸던 종탑이 무너져 현재 6개 종이 달린 종탑이 성당벽에 이어져 다시 만들어졌다. 이들 중 제일 오래된 것은 멕시코 종 제작가인 파울 루에라스(Paul Ruelas)가 멕시코에서 1795년에 제작한 것이고 제일 큰 종은 1830년 제작된 것으로 무게가 1톤이 넘으며 매일 세 번 기도시간에 울린다.
스페인으로부터 1821년 독립한 멕시코는 캘리포니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 멕시코는 미션 재산을 일반인들에게 팔아버리는데, 이로써 농장과 작업장 등이 황폐화 되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가 미국령이 된 후, 1859년 미국 정부는 미션 소유 토지를 다시 미션으로 돌려 주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현재 이 미션은 가톨릭 로스앤젤레스 대교구 소속으로 되어 있다.
캘리포니아 역사, 미션
캘리포니아 역사는 미션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처럼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그리고 왠지 성스럽기까지 한 단어인 ‘미션’을 길 이름으로 붙인 곳이 유독 많다. 미션 블로바드, 미션 애비뉴, 미션 로드, 미션 드라이브…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다가 ‘미션(Mission)’이라는 이름의 길을 보게 된다면 바로 그 근처 어딘가에 21개 중 하나의 미션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미션을 방문할 기회를 꼭 만들기를. 그렇게 한다면 캘리포니아 역사 한 가운데에서 파란만장했던 원주민들의 아픈 역사와 선교사들의 수고스러웠던 발자취와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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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왕의 도로’가 된다. 캘리포니아 남쪽 샌디에고부터 북쪽 샌프란시스코까지, 스페인 가톨릭 교화 기지였던 미션과 군사적 기지였던 요새, 그리고 원주민 거주지(Pueblos)를 연결한 도로였다. 현재 엘에이 다운타운을 관통하는 101번 고속도로는 엘 카미노 레알을 상당 부분 따라서 건설된 것이다.
당시 총 600마일 거리의 이 도로를 따라 450개 종들이 30마일 정도 거리를 두고 세워졌다. 현재 종들은 ‘성 프란치스코 지팡이’로 이름 지어진 양치기용 지팡이에 달려 있는 모양이다. 초창기에는 도로 표식을 위해 눈에 잘 띄도록 겨자씨를 뿌려, 봄이면 엘 카미노 레알을 따라 노란 꽃들이 잔뜩 피었다고 한다.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
후니페로 세라 신부는 1713년 11월 24일 스페인 마호르카 섬에서 출생하여 16세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750년 뉴스페인(현재 멕시코)에 파견되어 수도회 대학을 다녔다. 1769년 첫 번째 미션인 샌디에고 미션을 세우고, 그 후 1782년 아홉 번째 미션인 샌부에나벤투라(San Buenaventura) 미션을 설립한 후 2년 뒤 숨을 거두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지역 카멜 시에 세워진 샌카를로스 보로메오 드카르멜로 미션(San Carlos Borromeo de Carmelo Mission)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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