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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Story Nov 12. 2021

테하차피에 부는 바람

솔바람 소리와, 거기에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산새들 화음을 들으며, 산속 소나무숲 한가운데를 지난다. 고개 들어 소나무들 꼭대기 사이사이로 내비친 파란 하늘을 볼라치면, 저 아래 세상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다. 이곳, 테하차피(Tehachapi)에서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바람의 언덕, 테하차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북쪽, 컨(Kern) 카운티에 속하는 테하차피(Tehachapi)라는 도시를 알게 된 것은 ‘태고사(太古寺, Mountain Spirit Center)’라는 절 때문이었다. 종교가 다른 내게 태고사는 그저 미국에 있는 불교 사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테하차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곳 산 속에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통나무 산장’이라는 아담한 휴식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내 생각에 이름조차 서정적인 테하차피는 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 말로 ‘바람의 언덕’이라는 뜻이란다. 이곳에 부는 바람을 한번 경험하게 되면 왜 이 도시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는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5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향하다가 팜데일로 가는 14번 도로로 갈아 탄다. 58번 도로를 만나면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총 2시간 정도 달렸다면 모하비 사막 안에 자리잡은 테하차피에 도착할 수 있다.


통나무 산장에서 여정을 풀다

모래 진분 날리는 모하비 사막을 달리면서 인터넷에서 봤던 숲이 과연 이 척박한 사막 속에 존재하는 게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테하차피 구역(City Limit)에 당도하니 120도 정도로 비스듬히 늘어선 가로수들이 눈에 띈다. 바람 맞는 쪽은 가지와 잎새들이 엉성하다. 꼿꼿해야 할 나무가 반쯤 누워, 이곳이 바람의 도시라는 걸 알려 준다.

양떼 풀어놓은 아담하고 정겨운 초원을 지나 GPS가 알려주는 대로 좁은 길로 들어서 얼마 가지 않으니 숲이 시작된다. 들꽃, 수풀과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진 터널을 꼬불꼬불 지나가면서 “정말 숲이네!”라며 감탄했다. 마치 신기루 속 그린 홀(Green Hole)로 차가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린 홀은 마침내 우리를 통나무 산장 앞에 토해냈다. 그곳 세 마리 순둥이 견공들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데,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더니 거리가 손 뻗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벌러덩 눕는다.

산장지기 부부 말로는, 이 산장은 지어진 지 30년 되었고 자신들이 인수해서 통나무 산장을 운영한 지는 2년 되었단다. 산장은 본채와 별채가 있는데 본채 1층에는 벽난로가 있는 거실, 주방, 방 네 개과 두 개 욕실이 있고, 지하에는 방 한 개와 욕실, 작은 거실, 그리고 약초를 발효하는 효소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별채는 조금 떨어진, 이른바 ‘깊은 산 작은 연못’이 앞에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본채처럼 잘 꾸며져 있으리라 짐작한다.

산장 마당 편백나무 안에 새 생명이 태어났다


무량스님과 태고사

태고사(太古寺, Mountain Spirit Center)는 벽안의 무량스님(출가 전 이름 Erik Berall)이 자신이 받은 유산으로 목수 두 명과 함께 테하차피에서 10년 동안 지은 한국식 절이다. 무량스님은 1959년 생으로, 동부 아이비리그 예일대 출신인데 13살 때, 어머니가 자살함으로써 자서전 격인 책 제목처럼 ‘왜 사는가’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후 1983년 출가해 한국 화계사 숭산스님 제자가 되어 4년 동안 수도생활을 했다. 주지스님이 바뀌어 지금은 만나볼 수는 없지만 태고사에서 그의 10년 수행을 엿볼 수 있었다.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태고사는 대웅전과 관음전, 평화의 종각 이렇게 건물 세 채로 지어졌다. 풍수지리 상으로 명당 중 명당이며 기(Spirit, 또는 Energy)가 매우 센 곳이라고 한다. 그 기가 무량스님을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풍력발전단지(Wind Farm)

이곳이 진정한 ‘바람의 언덕’임을 증명하는 듯, 테하차피 언덕 언덕마다 거대한 바람개비(Wind Turbines)들이 무리지어 세워져 있다. 이곳은 팜스프링스와 함께 세계 최대 풍력발전단지로 꼽힌다. 한국 에너지 관련 기업들도 많이 견학을 오는 곳이기도 하며 남가주 에너지 생산의 주요한 자원이다. 테하차피 개인 가정집 앞에서도 큰 바람개비가 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풍력 에너지를 얻기 위해 자비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테하차피에 바람 한 줄기 보태다

테하차피 첫 거주자는 모든 미국 땅이 그렇듯이 아메리카 원주민이다. 그들의 삶이 수천 년 동안 이어졌던 곳, 그러나 지금은 지명과 몇 안되는 유물만 남았다. 그들 조상들은 ‘바람의 언덕’에서 바람처럼 살다 갔다. 최초 인류부터 현재 머무는 사람들까지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 많고 많은 이야기가 희로애락 바람 줄기가 되어 내 몸에 부딪친다.

살육 대상자였던 슬픈 역사의 아메리카 원주민이든, 잔인한 침략자 백인이든, 무소유 무량스님이든, 꿈꾸는 산장지기 부부든, 그리고 나 같은 이방인이든 인간은 억겁 세월 속에서 미래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 채 바람처럼 짧은 시간을 불다가 흩어지는 것이다. 바람이 되어 이리저리 불면서 다른 삶과 맞부딪치고, 또는 다른 삶의 바람을 온몸에 맞고서 엉기다가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인간이란 것이, 삶이란 것이 이렇게도 가벼운 것이다. 

이 작은 도시에 1박2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바람처럼 머물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바람 같은 이 땅에서의 삶을 ‘테하차피’라고 비유한 것은 아닐까. 테하차피라는 도시 이름은 그저 이곳의 강한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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