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복직은 박 실장님 직속 스텝이라는 굴욕적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10년간 쌓아온 프로젝트 기획 커리어를 잃었지만, 나는 이 자리가 역설적으로 회사 전체의 정보 흐름을 장악하는 '관제탑'임을 재빨리 파악했다. 박 실장님은 "핵심이 뭐야?", "장황해. 세 문장으로 줄여."와 같은 냉철한 지시로 보고서의 논리를 깎아내렸다. 나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실장님이 단순한 보고 내용 취합이 아니라 숨겨진 맥락과 데이터 분석을 기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실장님의 '빨간 펜 규칙'을 분석하고 철저히 체화했다. 수정 횟수가 급격히 줄자 실장님은 나에게 미세한 신뢰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비염 차와 같은 섬세한 배려까지 더해지자, 나는 단순한 스텝이 아닌 '맞춤형 보좌관'이 되었다.
박 실장님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자신의 전략적 판단을 이해하는지 시험에 드는 듯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질문들은 팀장들과의 논의에서 나올 법한 방향성에 대한 사전 점검이었다.
"한여름 씨, 다음 분기 프로젝트 배정 말인데. A팀과 C팀 중 어느 쪽이 적합하겠어요? 당신이 정리한 데이터와 두 팀의 현재 역량, 리더십 분위기까지 종합해서 보고해 봐요."
"실장님, A팀은 현재 인력 이탈 리스크가 높습니다. C팀이 리더십 점수는 낮으나, 새로운 리더의 투입만 있다면 빠른 성과를 낼 조직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장기적 관점에서 C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는 제 사견입니다."
나는 이제 단순히 데이터를 집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장님은 나의 분석을 통해 자신의 전략을 보강하고 계셨다.
나의 통찰력이 실장님의 신뢰를 얻자, 그분은 더 큰 롤을 부여했다.
"한여름 씨, 당신 분석대로 조직 내 리더십의 균열이 심각합니다. 나는 이번 기회에 조직 문화 개편을 통해 나의 리더십 위치를 확고히 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인사 평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리더십 강화를 위한 내부 조직 문화 개편 방안을 마련해 보세요. 팀장들에게 실질적인 변화를 강제할 수 있는 방안을 보고해 줘요."
나는 이 지시가 나에게 부여된 최고의 신뢰임을 깨달았다. 리더십 위치 확보를 위한 내부 조직문화 개편을 지시받은 것이다. 나는 이 임무를 위해 조직 구성원들과 비공식적인 인터뷰까지 진행하며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수집했다. 이 데이터를 통해 회사의 숨겨진 실체와 갈등의 고리를 완벽하게 꿰뚫었다.
내가 가진 스텝이라는 직책은, 과거 나를 '불안 요소'로 치부했던 팀장들 위에 정보의 칼을 쥐여주었다. 나에게 '아쉬운 대로' 면접만 봤던 하 팀장이 찾아와 정보를 요청했을 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하 팀장님. 실장님께서 보안 유지를 철저히 지시하셨습니다. 제가 직접 처리하는 자료는 실장님 지시 없이는 공유가 어렵습니다."
그가 실망하며 물러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제 '애 엄마'가 아니라, '박 실장님 직속의 정보 게이트키퍼'였고, 이것이 나의 새로운 권력이었다. 나는 박 실장님의 냉철한 전문성을 배우고, 그분의 가장 중요한 오른팔 역할을 수행하며 복직 적응에 성공했음을 스스로 확인했다. 유리 천장을 부술 칼날은, 이미 내 손안에 있었다.
바로 그 시점이었다.
저녁 늦게 이재를 재우고, 막 거실로 나온 나를 나정식이 침대 끝에 앉혀놓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움이 역력했다.
"여보, 우리 형 말인데... 결혼할 것 같아. 상견례 전에 우리한테 먼저 인사하자고 연락 왔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남편을 바라보았다. 힘들게 쌓아 올린 이 평화가 무너지기도 전에, 또 다른 '시월드'라는 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