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 지켜야 할 것들

by 제제

​바닥에 흩어져 밟히는 이혼 서류 조각들. 그것은 우리의 결혼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처참한 증거였다. 나정식이 그것을 찢었지만, 그 행동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차갑고 두꺼운 냉전이었다. 나는 그를 외면했고, 그의 눈빛을 피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지 않는 동안에도, 집안의 공기는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정식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변화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육아와 가사에 헌신했다. 과거 '같이'하던 육아는 이제 그의 전담이 되었다. 이재의 목욕 시간은 그의 몫이었고, 잠자리 동화책 읽어주기, 밤중 기저귀 갈기까지 모두 그가 도맡았다. 빨래는 퇴근 전에 미리 돌려놓았고, 청소는 퇴근 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책임졌다. 그의 일상은 이제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 그 자체였다.
​"여보, 오늘 점심에 회사 앞으로 잠깐 갈게. 밥이라도 같이 먹자. 1시간밖에 안 걸릴 거야."
​그는 주말은 물론, 평일 회사 앞까지 찾아와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필사적인 움직임은 나의 얼어붙은 마음에 아주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재를 내가 양육할 거니 고민하라'는 나의 말은 그에게 이재는 물론, 나까지 잃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를 안겨준 것이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아주버님의 상견례 날이 다가왔다. 시댁 어른들이 서울로 올라오시는 일정이었다. 나는 이 노골적인 차별의 현장에 다시 끌려가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정식이 먼저 나섰다.
​"여보, 걱정 마. 내가 동선 다 짰어.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서울 외곽에서 식사하고, 우리는 바로 빠질 거야. 이재가 보채서 오래 있기 힘들다고 내가 미리 말씀 다 드렸어. 이번엔 당신 힘들게 안 해."
​그는 시부모님이 오셔도 집에서 마주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집안일이 잔뜩 쌓이는 시댁 방문 대신, 동선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고급 외식과 짧은 차 시간으로만 일정을 한정했다. 그는 이재를 앞세워 대화의 주도권을 시부모님에게 내어주지 않으려는, 전략가인 내가 짜던 것과 흡사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상견례 당일, 나정식은 시부모님 옆에 앉아서도 마치 경호원처럼 나의 동선을 섬세하게 유도했다. 시종일관 이재의 컨디션을 핑계로 긴 대화를 막았고, 내가 시부모님과 단 둘이 마주쳐 불편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나정식은 이재를 안고 일어섰다.
​"어머니, 이재가 이제 졸려서 보채기 시작하네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이만 먼저 들어가서 재워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시어머님은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나정식이 너무 단호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통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시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봤다. 나의 마음을 풀기 위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는 드디어 나의 편에 서서 그의 집안과 맞서기 위한 노력을 하나씩 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 안은 다시 정적이 감돌았지만, 그 침묵은 과거의 냉기와는 달랐다. 나정식의 어깨는 무거웠지만,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남편의 노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나정식의 노력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방패가 되어주려 하지만, 시댁의 차별적인 시스템, 즉 '장손 우대'라는 구조 자체를 무너뜨릴 힘은 없었다. 나정식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순간, 나는 다시 그 차별의 한가운데로 던져질 터였다.
​나는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다.
​'나를 지키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이재를 이 불합리한 구조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나정식의 눈물이 아니라 나의 능력이다.'
​이 불안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회사에서 성공해야 했다. 박 실장님 옆의 '스텝'이 아니라,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일잘러로 복귀해야 했다. 돈과 명예, 그리고 회사 내에서의 확고한 지위. 그것만이 시댁의 무례함과 차별로부터 나 자신과 이재를 완벽하게 격리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유리 천장을 부술 칼날은 이미 내 손안에 있었다. 이제는 그 칼날을 휘두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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