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유아름과의 만남 이후, 나는 결심을 굳혔다.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나의 가치를 회사에서 증명하고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이 이 불안한 가정을 지킬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며칠 후, 박 실장님과의 정례 보고 시간. 보고가 끝난 후, 박 실장님이 서류를 정리하는 틈을 타, 나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실장님. 혹시 곧 있을 조직 개편과 인사이동 때, 저를 신규 프로젝트팀에 배치해 주실 수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박 실장님은 서류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드셨다. 그분의 냉철한 눈빛이 나를 꿰뚫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냉각되었다.
"한여름 씨, 지금 스텝으로서 제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 능력은 이미 팀장급 이상이고요. 왜 굳이 그 안정적인 위치를 포기하고 위험 부담이 큰 프로젝트팀으로 가려합니까?"
"감사합니다, 실장님. 하지만 저는 프로젝트 기획이 제 본업입니다. 실장님을 보좌하며 사업부 전체의 흐름을 파악했고, 현재 가장 필요한 리스크 관리 및 기획 전문성은 제가 제일 잘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강점을 논리적으로 피력했지만, 박 실장님은 선뜻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으셨다.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박 실장님은 잠시 창밖을 응시하시더니, 예상치 못한 어둡고 무거운 현실을 이야기하셨다.
"한여름 씨. 당신이 용기 있게 자신의 의사를 밝힌 것은 높이 삽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커리어를 고민할 때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죠. 우리 사업부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냉정했지만, 그 속에 담긴 무게는 압도적이었다.
"이번 하반기, 우리 사업부 전체적으로 강도 높은 호흡 조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경영진에서는 전체 인원을 절반 가까이 줄여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절반 가까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인사이동을 넘어, 조직의 생존 자체가 걸린 구조조정을 의미했다.
박 실장님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나에게 내미셨다. 짙은 회색의 서류철에는 '대외비: 인력 효율화 검토'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프로젝트 팀이 아닙니다. 이 서류는 인사팀에서 우리 사업부 인력 효율화를 위해 전달한 '구조조정 검토 대상 후보 명단'입니다. 한여름 씨, 당신은 현재 우리 사업부의 모든 인력 데이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의 눈빛이 나를 정면으로 마주쳤다. 차갑고 단호했다.
"이 명단을 재검토하고, 반드시 사업부의 미래를 위해 남겨야 할 인력과 정리해야 할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여 보고하십시오. 일주일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당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프로젝트입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나의 가치를 증명할 기획 프로젝트였으나, 나에게 주어진 것은 동료의 생존이 걸린 잔혹한 임무였다.
실장실을 나와 자리에 돌아온 나는 서류철을 펼쳐보았다. 수십 명의 이름과 그 옆에 A부터 E까지 매겨진 냉정한 인사 평가 데이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손가락으로 명단을 짚어 내려가던 나는 숨을 멈췄다. 익숙한 이름들이 연이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말 친하게 지내던 동기, 그녀와 함께 입사해 수많은 야근을 함께 했던 동료의 이름. 그의 옆에는 '잦은 육아 휴가로 인한 업무 공백 발생'이라는 비고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육아휴직 후 복직을 앞두고 있던 선배의 이름, 과거 '애 엄마는 불편하다'며 나를 거부했던 하 팀장의 이름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생계와 미래가 나의 손에 달린 것이다. 동료의 생존이 나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절망과 함께 깊은 윤리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회사에서의 생존이 동료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잔혹한 현실 앞에, 나는 벼랑 끝에 선 듯 아득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