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주방습격사건

by 제제

중국에서 밤샘 끝에 간신히 얻어낸 귀국이었다. 나의 첫 크리스마스는 나정식과의 로맨스가 아닌, 시부모님과의 ‘시월드 의무’로 셋업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신혼집에서 시부모님을 맞이한 나는, 거실 한쪽에 쌓인 이탈리아 캐리어 위로 불안함을 꾹 눌러 담았다.
​크리스마스 당일, 오전부터 현관이 떠들썩했다. 시부모님은 손수 당일 뜬 횟감, 통영 굴 한 상자, 그리고 김장 김치를 아이스박스에 가득 담아 오셨다. 그리고 나정식이 연락을 드려 모셨다는 미혼의 아주버님까지 합세했다.
​신혼집은 순식간에 잔칫집으로 변했다. 시아버님과 아주버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횟감을 드셨고, 시어머니는 주방을 진두지휘하며 요리를 하셨다.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는 예상외로 조용히 흘러가는 듯했다. '그래, 이렇게 평온하게 하룻밤만 잘 넘기자.' 나는 안심하려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결코 평온하게 지나가지 않으셨다. 식사가 끝난 후, 시어머니는 자연스럽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정식이 급하게 사놓은 마트 김치를 발견하셨다.
​“여름아.”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잔치상에서의 그 서늘한 목소리.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 먹는 김치를 넣어두니? 이런 김치를 먹고사냐. 쯧쯧. 나는 네가 똑똑해서 살림도 잘할 줄 알았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출장 때문에 이탈리아 캐리어조차 못 풀었는데! 잔치상 경고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기 냉장고며, 싱크대 살림이 이게 뭐니. 정신없어서 뭘 찾을 수가 있어야지. 네가 바빠서 그렇겠지만, 그래도 부엌살림은 정리해야지.”
​나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버틸 수 없었다.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위기를 모면했다.
​"어머님, 죄송해요. 출장이 너무 정신없이 이어져서 정말 정리를 못 했어요. 다음부터는...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급한 일이 없음에도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시부모님 얼굴을 마주하고 또 다른 지적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아침 7시, 회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은 연말을 즐기려는 사람들 덕분에 텅 비어 있었고, 중앙난방도 꺼져 공기마저 차가웠다. 나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전날 설쳤던 잠을 1시간 정도 잤다. 일어나 회사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우유로 아침을 때우고 차분히 중국 프로젝트 자료를 정리했다.
​'차라리 잘됐다. 여기가 내 안식처다.'
​나는 익숙한 일에 몰두하며 평온을 되찾았다.
​오후가 되자, 나정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 나 이제 막 부모님 KTX 태워 드리고 오는 길이야. 잘 가셨어! 고생했어 여보."
​전쟁이 끝난 것 같았다. 나는 신이 나서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나정식과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저녁도 먹으며 제대로 된 신혼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나는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했다.
​특히 부엌이!
​싱크대 수납장 내용물 배치가 싹 달라져 있었다. 내 취향대로 대충 넣어두었던 양념통들은 가지런히 정렬되었고, 냉장고 속 식재료들은 마치 군대 열병식처럼 각이 잡혀 있었다.
​“어? 부엌이 왜 이래?” 내가 당황해서 묻자, 나정식은 자랑스럽다는 듯 뒤이어 이야기를 했다.
​"아, 어머니가 여보 출근하고 나서 오전 내내 정리하셨어. 어제 살림 지적하시더니, 깔끔하게 다 해주고 가셨다네! 어머니가 손이 빠르시지?"
​그 순간, 나는 냉장고 손잡이를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이건 아니야! 정식아, 이게 내가 꿈꾼 결혼은 아니라고!"


​나는 소리쳤다. 내 영역이, 나의 공간이, 나의 병아리 같은 신혼살림이 존중받지 못하고 침범당했다는 절망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정식은 갑작스러운 나의 통곡에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지 놀라서 눈만 끔벅였다.
​나는 나정식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왜! 왜 내 허락도 없이! 내가 바빠서 못 풀었던 이탈리아 캐리어가 아직도 저기 있는데, 왜 내 영역을 이렇게...!!"
​흐르는 눈물은 그동안의 잔치상에서 억지로 삼켰던 눈물, 그리고 결혼이란 이름으로 짓눌린 나의 자존감이 뒤섞여 폭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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