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당일, 눈물로 밤을 새운 내가 어떻게 웃었는지, 그 순간의 기억은 뿌옇다. 하지만 나정식과 함께 이탈리아로 향했던 것만은 생생하다. 베네치아의 낭만과 로마의 유적지 앞에서, 나는 시월드의 악몽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 둘의 행복만 남았어." 정식의 말에 기대어, 나는 겨우 위안을 얻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꿈에 그리던 신혼의 로망은 이탈리아에서 온 캐리어를 풀 새도 없었다. 거실 한쪽에 쌓인 박스들과,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캐리어들을 뒤로한 채, 나는 곧바로 회사에 복귀했다. 복귀와 동시에 신 책임, 조 선임과 함께 진행할 중국 신규 프로젝트 셋업팀에 합류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 한여름씨! 중국 복수 비자 나왔죠? 이번 프로젝트는 길어질 겁니다." 신 책임은 해맑게 웃었지만, 내 속은 타들어 갔다. 신혼집을 제대로 정리도 못한 채, 결혼 전 해외 출장에 썼던 캐리어에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옷가지들까지 대충 쑤셔 넣고 다시 중국행 캐리어에 짐을 옮겨 담는 그 기분이란!
중국 현지 업무는 예상대로 숨 쉴 틈이 없었다. 밤샘 이슈 해결과 현지 논의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이것만 끝내고 정식이랑 이탈리아 기념품이라도 꺼내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우리 팀원들의 사정은 각기 달랐다. 신 책임은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출장비를 벌어오려는 베테랑 가장이었고, 조 선임은 일만 잘 풀리면 결혼할 수 있을 거라 믿는 노총각이었다.
그들의 목표와 달리,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짧은 신혼 생활이라도!'
시간은 쉼 없이 흘렀고, 어느덧 12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코앞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정식과 따뜻한 첫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 업무를 광적으로 서둘렀다. 현지 팀을 쥐 잡듯 몰아치고, 밤샘 끝에 간신히 귀국 일정을 확정 지었다.
"여보, 나 드디어 이번 주에 들어가! 우리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자!"
오랜만에 듣는 남편 나정식의 목소리는 반가웠지만, 정식의 다음 말은 내 귀에 청천벽력처럼 꽂혔다.
"어, 여보! 잘 됐네. 마침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 첫 크리스마스라고 같이 보내신다고 서울로 오고 싶어 하셔. 어머니가 우리 얼굴도 못 본다고..."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밤샘 업무를 하고 있던 내 몸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국길 비행기 표가 당장이라도 취소되길 바랄 만큼 패닉이었다.
'첫 크리스마스'는 나정식과의 로맨틱한 데이트가 아니라, '잔치상 경고'가 재현될 수도 있는 시월드 미션이 되어버렸다. 캐리어도 못 풀고 떠났던 신혼집에서 시부모님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나는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결혼식 전날 밤 숙소에서 흘린 눈물, 현명하게 뒷받침해 주라는 시어머니의 당부.
'아니, 내가 왜 이탈리아에서 온 캐리어 옆에서 시월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해?'
일잘러였던 나의 머릿속에, 크리스마스 로맨스 대신 시댁과의 '최종 프로젝트'가 갑자기 셋업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