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면 안되는 것들...

니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by 이건


비가 오던 날이었다.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부슬부슬 내리며

누가 박자를 맞추듯 리듬을 타는 비.

그날의 빗소리는 슬픔에 규칙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람은 큰이모였다.

다른 어른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괜히 무섭고 귀찮았지만,

큰이모가 부를 때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나를 안아주는 기분이었고,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날,

이모는 누워계셨다.

오랜 투병 끝에 세상과 작별하셨다.

염습을 하느라 꽁꽁 묶인 이모의 모습을 보는데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사람들은 울었고,

검은 옷들이 지나갔고,

어른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례미사가 한창이었다.

나는 이모가 편안한 여행을 가길 바라며

처음으로 진심 어린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멀끔한 정장 차림의 여자 두 명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는 어딘가 달랐다.


내가 돌아보자 그중 한 여자가 말했다.

“가서 상자 열쇠 달라고 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나는 멍청하게도, 순순히 “네.” 하고 대답했다.

그것도 아주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그리고 사촌형에게 물었다.

“형, 열쇠 어디 있어?”

형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그땐 몰랐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 ‘열쇠’가 단순한 열쇠가 아니라는 걸.

이모의 폐물을 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나는 그 손에 이용당했다는 걸.


그걸 알았을 때,

어린 나는 처음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배웠다.

세상에 대한 분노,

어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장례식은 계속됐다.

밖에선 비가 더 거세게 내렸다.

나는 울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차가운 비 냄새를 맡으며 서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어른들의 말을 쉽게 믿지 않게 됐다.

그때 내 나이, 열다섯이었다.

사람들의 미소 속에도 계산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걸 배웠고,

세상에는 눈물보다 더 잔인한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날이 내가 처음 세상을 배운 날이었다.

슬픔이 꼭 눈물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진짜 슬픔은 ‘믿음이 깨지는 순간’에 오는 거라는 걸.


그날의 빗소리와 냄새,

그리고 죄책감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지질이도 공부 안 하던 내가

미친 듯이 책을 붙잡기 시작한 게.


‘멍청하면 안 된다.’

그 문장이 못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그때 큰이모가 하늘에서 보고 있었다면

나에게 뭐라고 했을까.


“괜찮어 아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들이 열려고 했던 것은 이모의 보석함 이었지만, 열린것은 내안의 판도라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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