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청와대의 정적은 겉으로는 평온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했고, 경제는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내부는 균열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그 균열의 중심에는 한 인물이 있었다. 최태민. 그는 목사였고, 구국봉사단 총재였으며, 박근혜의 정신적 멘토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등장은 단순한 종교인의 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가장 깊은 곳에 침투한 그림자의 도래였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한 후 박근혜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녀는 청와대의 안주인 역할을 맡으며 외로움과 책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그 틈을 파고든 자가 최태민이었다. 그는 “어머님의 영혼이 나를 통해 당신과 대화하고 있다”고 말하며 박근혜에게 접근했다. 처음엔 경계했지만, 박근혜는 점차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최태민은 구국봉사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앉혔다. 그는 박근혜의 이름을 내세워 기업과 인사들에게 접근했고, 각종 이권을 챙겼다. 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고, 청와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중앙정보부는 그의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고, 그 결과는 김재규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최태민의 등장은 단지 현대 정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조선시대의 채홍사 제도를 떠올리게 했다. 채홍사(採紅使)는 연산군 시절, 전국에 파견되어 미녀를 강제로 선발해 궁궐로 불러들이던 임시 관원이었다.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딸을 빼앗기는 고통을 느껴보라”며 복수심에 불타 채홍사를 조직했다. 뽑힌 여성들은 흥청, 운평, 광희라 불리며 궁중 연회와 향락에 동원되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흥청망청”이다.
최태민의 행보는 이 채홍사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듯했다. 그는 여성 정치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고, 구국봉사단을 통해 권력과 성을 교묘히 엮었다. 그의 조직은 종교적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 내부는 이권과 향락, 그리고 권력의 탐욕으로 가득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오랜 측근이었다. 그는 경북 출신으로 박정희와 지역적 인연이 있었고, 군 시절부터 신뢰를 받아왔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그는 청와대의 안보와 정보 관리를 책임졌고, 최태민의 존재는 그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김재규는 최태민의 비리를 수차례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는 “최태민은 구국봉사단을 이용해 기업을 갈취하고, 여성 정치 지망생들을 성추행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묵살했다. 오히려 구국봉사단 총재직을 박근혜에게 넘기며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만들었다. 김재규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라의 암적 존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고, 점차 결심을 굳혀갔다.
박근혜는 최태민과의 관계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최 목사님은 나에게 정신적 지주이며, 어머니의 뜻을 이어주는 분”이라고 말했고, 그의 조언을 정치적 판단에도 반영했다. 박근영과 박지만은 이 관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근혜는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 관계는 훗날 박근혜 정부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국정농단 사건의 중심이 되었다. 최태민의 그림자는 단지 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세습과 정신적 지배라는 형태로 이어졌고, 채홍사의 유산처럼 여성과 권력의 교차점에서 비극을 낳았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향해 총을 들었다. 그는 “각하는 내 은인이지만,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날의 총성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김재규에게는 방어의 행위였다. 그는 최태민의 영향력, 차지철의 강경 노선, 박정희의 판단력 상실을 모두 종합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사형 직전까지도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최태민은 교통사고라도 내서 처치해야 할 놈이다”라고 말하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거사는 박근혜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이후 최태민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훗날 최순실로 이어지는 그림자는 계속되었다.
최태민의 조직은 단지 종교적 집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판 채홍사였다. 여성의 정치 참여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그 내부는 성적 착취와 권력의 도구화로 가득했다. 조선시대의 채홍사가 신하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복수의 수단이었다면, 최태민의 조직은 박근혜의 정신적 지배를 통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려는 수단이었다.
그는 여성들을 선발하고, 그들을 통해 기업과 정치인을 연결했다. 그의 영향력은 청와대 내부를 넘어, 재계와 종교계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박근혜가 있었다. 그녀는 최태민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의 조언을 정치적 판단에 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