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대통령의 시대

by 김작가a

『바보 대통령의 시대』— 노무현 재임기의 기록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이 취임했다. 그는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지역주의와 기득권에 맞선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 그의 취임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치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고, 그 꿈은 곧 거대한 저항과 마주하게 되었다.

1. 개혁의 서막: 검찰과 언론, 그리고 정치

노무현은 취임 직후부터 개혁을 선언했다.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검찰이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는 곧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검찰총장 인사에서부터 기존 관행을 거부했고, 이는 검찰 내부의 반발을 불러왔다. 언론도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 언론은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확대 해석하며 비판했다.

그는 언론과의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직접 국민과 소통했고, 기자회견과 토론회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방식은 기존 정치 문법과 달랐고, 많은 이들에게 낯설었다. 그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말로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기득권과 싸우는 한 인간의 절규였다.

2. 탄핵 사태: 민주주의의 시험대

2004년 3월,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유는 공직선거법 위반이었다. 그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야당은 이를 빌미로 탄핵을 추진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었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국정은 총리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헌법재판소는 결국 탄핵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복귀했고, 국민은 그를 지지했다. 탄핵을 주도했던 야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보여준 동시에, 정치의 민낯을 드러낸 계기였다. 노무현은 이후 “민주주의는 유권자의 수준만큼 발전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국민을 믿는다는 선언이었다.

3. 수도 이전과 지방 분권: 균형 발전의 실험

2005년, 노무현은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했다.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는 충청권에 신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는 곧 헌법재판소의 제동에 부딪혔다. 헌법재판소는 수도 이전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세종시라는 이름으로 계획을 수정했고, 혁신도시와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병행했다.

지방 분권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그는 “지역주의를 타파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도권 중심의 기득권은 강했고, 지방 이전은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그는 그 저항을 감내하며, 균형 발전이라는 이상을 향해 걸어갔다.

4. 남북 관계: 평화의 길을 걷다

노무현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했다. 그는 남북 철도 연결을 추진했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활성화했다. 2007년 10월, 그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회담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채택되었다.

그는 NLL(북방한계선)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보였고, 이는 보수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평화를 위한 실질적 진전을 이루었다. 그는 “전쟁을 막는 것이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그의 철학이었다.

5.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 현실 정치의 고뇌

노무현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은 이를 신자유주의적 정책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이라크 파병도 결정했다. 미국과의 동맹을 고려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그 결정은 많은 국민의 반발을 불러왔고, 그는 고독한 선택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외교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를 타협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고, 그 줄은 언제나 위태로웠다.

6. 부동산 정책과 양극화: 민생의 무게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가격 안정화를 위해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고, 다주택자 규제를 강화했다. 하지만 시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상승했고, 국민의 불만은 커졌다. 그는 “부동산으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양극화도 심화되었다. IMF 이후의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증가, 청년 실업은 그의 정부에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기초노령연금 도입과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했지만, 민생의 고통은 여전했다. 그는 “정책은 옳았지만, 국민은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7. 측근 비리와 정치적 고립

그의 측근들이 비리에 연루되었다. 안희정, 이광재, 변양균 등 개혁 인사들이 검찰 수사를 받았고, 국민의 신뢰는 흔들렸다. 그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며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그는 열린우리당과의 갈등, 야당과의 대립 속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그는 “정치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고, 청와대는 점점 조용해졌다. 그는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시도했지만, 그것은 갈수록 힘을 잃었다.

8. 퇴임과 봉하마을: 민주주의의 씨앗

2008년 2월, 그는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퇴임 후에도 국민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그는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했고, 시민들과의 만남을 지속했다. 그는 “나는 실패한 대통령이었다”고 말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를 기억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었다. 그는 권위주의를 거부했고, 국민을 믿었다. 그는 기득권과 싸웠고, 그 싸움은 때로 외로웠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었고, 그 꿈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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