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박종철이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해명은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 분노는 곧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해 6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민주화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나는 그 시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대학 캠퍼스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혁명의 열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열기 속에는 또 다른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주사파’로 불리는 NL계열 운동권과의 이념적 대립이었다. 그들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고, 반미·친북 노선을 강하게 주장했다. 나는 그들과 달랐다. 나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생운동을 꿈꾸었다.
1987년의 캠퍼스는 단순한 학문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념의 전장이었고, 사상의 격전지였다. 주사파는 전대협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강의실을 점거하며 자신들의 노선을 강요했다. 그들은 ‘민중혁명’을 외쳤고, ‘통일전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은 때로 폭력적이었고, 배타적이었다. 다른 의견을 가진 학생들은 ‘반동’으로 몰렸고, 토론은 억압되었다. 나는 그들과 맞섰다. 나의 운동은 ‘자유주의적 민주화’를 지향했다. 우리는 토론을 중시했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했다. 우리는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단지 ‘반미투쟁’의 도구로 삼지 않았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국가의 책임을 묻고자 했다.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외쳤고, ‘폭력 없는 저항’을 실천했다. 그 대립은 격렬했다. 주사파는 우리를 ‘기회주의자’라 불렀고, 우리는 그들을 ‘전체주의자’라 비판했다. 그러나 그 갈등 속에서, 새로운 학생운동의 지평이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념을 넘어선 연대였고, 사상을 초월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1987년의 격동은 단지 거리의 함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함성은 캠퍼스 안으로 스며들었고, 강의실과 도서관, 동아리방과 게시판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씨앗을 틔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씨앗을 심는 사람이었다. 주사파가 장악한 학생회와 전대협의 구조 속에서, 나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민주화 운동’이었다.
주사파는 조직적이었다. 그들은 ‘민중해방’이라는 이름 아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은밀히 전파했고, 반미·친북 노선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통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학내 정치의 중심을 차지했고, 이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 틈새를 꿰맸다. 나는 학내 언론을 통해, 소모임을 통해, 그리고 강의실의 토론을 통해 다른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자유’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존재의 자유였다. 우리는 ‘민주화’라는 단어를 주체사상의 도구로 삼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존엄을 위한 제도적 기반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국가’와 ‘사회’를 분리했고, ‘개인’의 권리를 중심에 놓았다.
조직의 재구성 — 꿰맴의 실천
나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학생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은 기존의 운동권 조직과 달랐다. 우리는 수직적 명령체계를 거부했고, 자율적 토론과 합의에 기반한 운영을 지향했다. 우리는 ‘운동’이 아니라 ‘실천’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꿰맴이었다. 찢긴 시대의 틈을 꿰매는 실천, 상처 입은 공동체를 봉합하는 실천이었다. 우리는 학내에서 ‘자유주의 포럼’을 열었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연속 세미나를 개최했다. 우리는 주사파의 강압적 논리를 비판했고,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민중’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했다. 민중은 이념의 도구가 아니라,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이었다.
당시의 운동권은 종종 폭력적이었다. 시위는 격렬했고, 학내 점거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달랐다. 우리는 ‘비폭력’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것은 단지 전략이 아니라, 윤리였다. 우리는 ‘저항’이 ‘파괴’가 아니라 ‘창조’여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분노’가 ‘증오’로 흐르지 않도록 꿰맸다. 나는 종종 밤늦게 도서관에 앉아, 천 위에 문장을 꿰맸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할 때 완성된다.” 그 문장은 우리의 운동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꿰맴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윤리를 수놓았다.
1987년 6월, 서울의 거리는 숨을 쉬지 못했다. 최루탄은 하늘을 가렸고, 구호는 땅을 흔들었다. 나는 그 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박종철의 죽음은 분노의 불씨였고, 이한열의 희생은 그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쳤고, 독재에 맞섰다. 그러나 그 외침 속에서도 나는 꿰맴을 잊지 않았다. 나는 찢긴 시대를 꿰매고 있었고, 그 실은 철학이었다.
우리는 종로에서, 명동에서, 광화문에서 모였다. 손에는 피켓을 들었고, 가슴에는 문장을 품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 민주 회복.” 나는 그 구호를 천에 꿰맸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존재의 외침이었다. 우리는 존재하고 싶었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엄한 시민으로. 시위는 격렬했다. 경찰은 곤봉을 휘둘렀고, 우리는 도망쳤다. 그러나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멈춰 섰고, 연행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은 차가웠고, 그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나는 묻지 않았다. 나는 꿰맸다. “침묵은 저항이다.” 그 문장은 내 몸에 새겨졌다.
구금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사유의 시간이었다. 나는 철창 너머로 시대를 바라보았고, 그 시대의 본질을 꿰맸다. 나는 사르트르를 떠올렸고, 한나 아렌트를 읽었다. “자유는 선택의 고통이다.” 나는 그 고통을 꿰맸다. 나는 선택했다. 폭력이 아닌 꿰맴을, 증오가 아닌 이해를. 동료들은 고문을 당했고, 나는 그들의 이름을 천에 수놓았다. ‘정훈’, ‘미경’, ‘태섭’. 실은 떨렸고, 바늘은 깊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꿰맸고, 그 꿰맴은 나의 철학이 되었다. 우리는 찢겼지만, 꿰맴으로 이어졌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단지 정권 교체인가, 아니면 인간의 회복인가. 나는 꿰맴을 통해 답을 찾았다. 우리는 인간을 꿰매고 있었다. 찢긴 존엄, 훼손된 자유, 잊혀진 이름. 우리는 그것을 꿰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꿰맴은 윤리였다. 나는 주사파의 폭력적 방식에 반대했다. 그들은 ‘혁명’을 외쳤지만, 나는 ‘회복’을 외쳤다. 그들은 ‘적’을 만들었지만, 나는 ‘결’을 읽었다. 우리는 다르지만, 꿰맴은 같았다. 나는 그들과 싸우지 않았다. 나는 꿰맸다. 그것이 나의 저항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정치적 성과를 남겼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단순한 승리의 연장이 아니었다. 민주화의 문턱을 넘은 이후, 운동권은 새로운 질문에 직면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질문은 운동의 방향을 흔들었고, 이념의 균열을 드러냈다.
1988년 이후, 주사파는 더욱 조직화되었고, 일부는 정당 창당을 통해 정치권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민중민주주의’를 외쳤고,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시대의 흐름과 충돌했다. 냉전은 끝나가고 있었고, 북한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사파의 논리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갔다. 한편, 나와 뜻을 같이했던 자유주의적 학생운동은 점차 소수화되었다. 우리는 꿰맴을 이어갔지만, 시대는 점점 ‘정치’와 ‘권력’의 언어로 기울었다. 학생운동은 더 이상 사유의 공간이 아니었고, 전략과 동원, 그리고 선거의 기술로 변해갔다. 나는 그 변화 속에서 꿰맴의 실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1990년대 초, 나는 캠퍼스를 떠났다. 그러나 꿰맴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시민운동의 현장으로 옮겨갔다. 인권단체, 환경운동, 지역사회 활동. 그곳에서도 찢긴 틈은 있었고, 꿰맴이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천을 꺼냈고, 실을 잡았다. “존엄은 제도보다 깊다.” 그 문장은 시민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나는 거리에서, 회의장에서, 그리고 마을의 골목에서 꿰맸다. 꿰맴은 더 이상 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었고, 공동체의 윤리였다. 나는 수연을 떠올렸고, 민철을 기억했다. 그들의 침묵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고, 나는 그 침묵을 꿰맸다.
2025년의 오늘, 나는 다시 천을 꺼낸다. 그 천에는 박종철의 이름이 있고, 이한열의 눈빛이 있다. 수연의 손과 민철의 창문이 있다. 그리고 나의 꿰맴이 있다. 그 실은 여전히 떨리고, 바늘은 여전히 깊다. 그러나 나는 꿰맨다. 시대가 바뀌어도, 꿰맴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