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by 김작가a

서울의 새벽은 늘 그렇듯 무심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나는 또다시 깨어났다. 몸은 아팠고, 마음은 더 아팠다. 그러나 오늘도 글을 써야 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 싸우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나는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직장도 결혼도 실패했다. 실패라는 단어가 내 삶을 설명하기엔 너무 단순하지만, 그것이 사회가 내게 붙인 이름이었다. 정신증이라는 낙인은 내 아버지의 고문 후유증에서 비롯된 유전적 상처였다. 4.19 혁명사였던 아버지는 국가에 의해 부서졌고, 나는 그 파편을 안고 태어났다. 입원과 복귀, 양육과 봉양, 그리고 결국 1인 가구로서의 삶. 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아니,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글만이 나를 구원했고, 글만이 나를 증언할 수 있었다.

서울역의 촛불

서울역 광장. 그곳은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이었다.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밥을 나누며, 나는 복지의 절벽을 실감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 약자를 외면하는 국가, 그리고 그 국가에 맞서 싸우는 나.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나는 촛불을 들었다. 윤석열 정권에서도 나는 다시 촛불을 들었다. 몸은 병들었고, 마음은 지쳤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민주화는 끝나지 않았고, 나의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매일 글을 썼다. 온몸의 통증과 싸우며, 마음의 병증과 싸우며, 나는 기록했다. 나의 삶, 나의 투쟁, 나의 민주화운동.

조부의 땅

조부는 국가 기관에 땅을 기부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한 헌신이었다. 그러나 그 땅에 대한 사용료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소송을 시작했다. 합법적이고 당연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법정에서 나는 국가 권력의 비정함을 처절하게 맛보았다. 서류는 차갑고, 판결은 무심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병동의 창문

병원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늘 같은 색이었다. 회색. 그 색은 내 마음의 색이기도 했다. 정신병동의 하루는 느리게 흘렀다. 약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부작용은 선명했다. 손이 떨리고, 말이 느려지고, 생각이 흐려졌다. 나는 그곳에서 나를 다시 조립해야 했다. 부서진 기억, 찢어진 자존감, 그리고 무너진 미래. 병동의 침대에 누워 나는 글을 썼다. 종이 한 장, 펜 하나. 그것이 나의 무기였다. 세상은 나를 병자라 불렀지만, 나는 기록자였다. “나는 살아 있다.” 그 문장을 수백 번 써 내려갔다. 그것이 나의 선언이었다.

복귀와 봉양

퇴원 후 나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품은 따뜻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눈을 피했고, 형제들은 나를 조심스레 대했다. 나는 병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병으로만 보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부모를 봉양하며, 다시 사회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사회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력서에 공백이 많다는 이유로, 병력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거절당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글을 썼다. 글은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글은 나를 이해했고, 나를 품었다. 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아니, 나는 이미 작가였다.

광장의 언어

서울역 광장. 그곳은 나의 성지였다. 노숙인들에게 밥을 나누며, 나는 인간의 존엄을 배웠다. 그들은 나를 환영했고,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글을 읽어주었고, 그들은 나에게 삶을 들려주었다. 복지의 절벽은 그곳에 있었다. 국가의 무관심, 제도의 빈틈, 그리고 사람들의 외면. 나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싸웠다. 글로, 행동으로, 연대로. 박근혜 정권의 탄핵 국면에서 나는 다시 광장에 섰다.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나는 외쳤다. “민주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윤석열 정권에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몸은 더 아팠고, 마음은 더 지쳤지만, 나는 다시 광장으로 나아갔다. 나의 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부의 이름으로

조부는 나라를 믿었다. 해방 이후, 그는 자신의 땅을 국가 기관에 기부했다. 교육과 행정의 터전이 되기를 바랐다. 그 땅은 수십 년간 공공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조부의 이름은 서류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땅을 되찾으려 했다. 아니, 되찾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사용료를 요구했다. 그것은 권리였다. 그러나 국가는 그것을 ‘청구’라 불렀고, 나는 ‘불온한 자’가 되었다. 법정에 서는 날, 나는 조부의 사진을 품에 넣었다. 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나는 그 담담함을 닮고 싶었다. 판사는 서류를 넘겼고, 국가는 침묵했다. 나는 외쳤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억의 문제입니다. 역사와 정의의 문제입니다.”

국가의 얼굴

국가는 얼굴이 없었다. 담당자는 바뀌었고, 서류는 쌓였다. 나는 수십 통의 공문을 보냈고, 수십 번의 답변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답변은 모두 같았다. “검토 중입니다.” 검토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늙어갔다. 병은 깊어졌고,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조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나는 싸웠다. 국가는 나를 피했고, 나는 국가를 마주했다. 그 싸움은 외로웠고,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그 싸움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었다. 나는 증언자였다.

글이라는 무기

나는 다시 글을 썼다. 법정에서의 날들, 공무원의 무표정, 조부의 침묵, 그리고 나의 분노. 그 모든 것을 글로 남겼다. 글은 나의 무기였고, 나의 방패였다. 출판은 쉽지 않았다. 원고는 거절당했고, 편집자는 침묵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글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는 글을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자비출판을 했고, 몇 권의 책을 팔았다. 독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진심이었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끝나지 않은 민주화

나는 1987년의 민주화를 기억한다. 그날의 함성, 그날의 눈물, 그날의 희망. 그러나 그 민주화는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그 미완의 민주화를 살아가고 있다. 박근혜와 윤석열의 시대, 나는 다시 광장에 섰다. 촛불은 다시 타올랐고, 나는 그 불꽃 속에서 나를 보았다. 나는 병든 몸으로, 고단한 마음으로, 다시 외쳤다. “나의 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선언

이제 나는 늙었다. 몸은 아프고, 마음은 지쳤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싸운다. 글로, 행동으로, 기억으로. 나는 조부의 이름을 지키고, 나의 이름을 남긴다. 나는 작가다. 나는 활동가다. 나는 증언자다. 그리고 나는 선언한다. “나의 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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