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긍정의 리더십

by 김작가a

가난한 나라의 뜻있는 지도자

1961년 봄, 서울의 하늘은 흐렸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엔 희망보다 허기가 먼저 떠돌았다. 그날, 한 남자가 조용히 군복을 여미고 청와대로 향했다. 그의 이름은 박정희. 그는 군인이었고, 혁명가였으며, 무엇보다도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그가 처음으로 국민 앞에 내건 구호는 단순했지만 강렬했다. 그 말은 곧 시대의 슬로건이 되었고,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박정희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뚫었고, 포항제철을 세웠으며, 새마을운동을 통해 전국의 마을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리더십은 단호했다. 때로는 독재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 단호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최빈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지도자의 철학이 없으면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경제는 성장했고, 국민의 삶은 달라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수십 배로 뛰었고,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박정희는 공장의 준공식마다 빠짐없이 참석했고, 국산 넥타이를 매기 위해 상공부에 기술개발을 지시할 정도로 국산품 애용에 철저했다. 그는 청렴했다. 가족과 측근에게도 엄격했고,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은 이렇게 회고했다. “박정희는 경제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을 사용했다.” 그의 통치 아래, 현대·삼성·포항제철 같은 기업들이 성장했고, 중화학 공업이 국가 산업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새마을운동은 베트남, 네팔, 라오스 등 개발도상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그는 자주국방을 강조했고, 북한의 위협 속에서도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그의 휘호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서거 45주기를 맞아, 구미의 생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그들은 그를 기억했다.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뜻있는 지도자, 박정희를.

한강의 기적, 그 시작

서울의 거리는 여전히 분주했다. 하지만 그 분주함은 이제 생존이 아닌 성장의 열기였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이후, 가장 먼저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그는 말했다. “통일의 길은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했다. 많은 이들이 “차도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가 웬 말이냐”고 비웃었지만, 박정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차를 만들면, 도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산업의 대동맥이 되었고, 포항제철은 철강의 심장을 뛰게 했다. 수출은 급증했고, 국민소득은 눈에 띄게 상승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나라가, 20년 만에 2만 달러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는 기업을 키웠다. 현대, 삼성, LG, 롯데… 모두 그의 시대에 뿌리를 내렸다. 박정희는 공장의 준공식마다 빠짐없이 참석했고, 기업인들과 밤늦게까지 회의를 했다. “공장이 돌아가야 나라가 돌아간다.” 그의 경제정책은 단순했다. 수출을 늘리고, 저축을 장려하고, 식량 자급을 실현하는 것.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 철학이 있었다. 그는 자립을 강조했고,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를 꿈꿨다.

새마을의 꿈

1970년, 박정희는 농촌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시는 발전하는데, 농촌은 왜 그대로인가.” 그는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다. 초가집을 헐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마을마다 지도자를 세우고, 공동체 정신을 심었다. “우리가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그 구호는 전국을 휩쓸었다. 농촌은 변화했고, 자립심이 생겼다. 새마을운동은 단순한 개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의 혁명이었다. 베트남, 네팔, 라오스 등 개발도상국은 이를 벤치마킹했다. 박정희는 농민을 존중했다. 그는 말했다. “농민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는 농업기술을 발전시키고,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학교가 생겼다. 아이들은 도시로 가지 않아도 배울 수 있었다.

리더의 철학

박정희는 청렴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은 회고했다. “박 대통령은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를 제외하고 모두 국산을 사용했다.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풀려 상공부에 기술개발을 지시할 정도였다.”

그는 가족에게도 엄격했다. 측근의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고, 부정부패를 철저히 단속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깨끗해야 한다.” 그는 인사에 능했다. 전문가 30인이 평가한 리더십에서 박정희는 인물의 발탁과 운용에 능한 인사전략가로 꼽혔다. 그는 능력 위주의 인사를 했고, 젊은 인재를 과감히 등용했다. 그는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구호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정신이었다.

유산과 기억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불의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날, 서울의 하늘은 다시 흐렸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남았다. 매년 10월 26일, 구미의 생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한다. 그들은 그를 기억한다.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뜻있는 지도자, 박정희를. 그의 휘호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철학은 남았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길은 이어지고 있다.

화, 목, 토 연재
이전 20화박정희와 전체주의 통수권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