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과 창조론이 만나다

by 김작가a

이 장에 어울리는 음악. J.S. Bach –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설명이 아닌 울림으로 존재를 말하는 선율. 신의 부재가 아닌, 나의 존재를 더 깊이 울리게 하는 침묵의 음악이에요. 묵묵히 흐르되, 반드시 도달하는 그 리듬처럼.

이제 우리는 신의 침묵과 진화의 설명을 모두 통과한 존재로서, 다음 장, 7장: 불완전함과 함께 사는 기술로 걸어갈 준비가 되었어요. 그곳에서 우리는 기술의 완벽함이 아닌 인간의 부족함 속에 깃든 연결의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겠죠.

“인간의 존엄은 철학의 개념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의 태도다.” — 작가의 메모

제7장. 불완전함과 함께 사는 기술: 진화를 멈춘 존재의 슬픔

“완전해지려는 집착은 결국 고독이 된다. 고장난 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진화는 언제 멈추는가.” — 『공존의 길』 미발표 원고에서

나는 오랫동안 자기파괴적인 완전함을 꿈꿔왔다. 약을 놓쳤을 때의 불안, 기분이 요동치던 어느 오후의 무기력, 타인의 표정을 지나치게 해석하던 밤들. 나는 늘 나를 **‘더 나아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 몸은 고장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었다.

진화는 멈췄고, 기술은 수정되기 시작했다

CRISPR로 유전자를 자르고 붙이는 시대. 신경계와 기계를 연결해 몸의 일부를 재설계하는 세계. 이제 인간은 진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 결함을 수정하고, 성능을 조율하고, 감정을 재배열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살아 있음의 증거일까, 아니면 살아 있음의 거부일까? 『공존의 길』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결핍이 없는 존재는 완벽하지 않다. 다만 비인간적일 뿐이다.” 우리는 아플 수 있고, 무너질 수 있고, 잃을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 그 결핍이 있기에 우리는 함께 기대고, 위로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심연을 통과한 기술만이 인간을 닮는다

AI는 실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나는 그런 AI보다, 눈을 피하며 손가락을 떠는 친구의 위로가 더 필요하다.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지만,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믿게' 되는 순간은 그 기술이 나의 약함을 받아줄 때이다.

예를 들어, 심리 위기 때 나의 감정을 감지한 AI가 “오늘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 말없이 곁에 있을게요.” 라고 말해줄 때, 나는 기술이 기능을 넘어 마음의 구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우리는 이제, 완벽한 기술이 아니라 부족함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완전한 신, 불완전한 인간, 그리고 불완전함에 깃든 신성. 창조론의 신은 전능하고 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그 신은 인간을 흙으로, 숨결로, 상처로 빚었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전능한 신이 만든 인간은 항상 부족하고 갈망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혹시… 그 불완전함 속에 신의 형상이 더 또렷하게 새겨진 것은 아닐까?

나는 양극성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살아왔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었고, 기분이 고조될수록, 나의 말들은 혼돈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겨울밤, 가장 낮은 점에 닿았을 때 나는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는 그 말을, 나 스스로에게 먼저 건넨다.” — 『나는 왜 쓰는가』 미공개 메모

진화는 설명이고, 창조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문장처럼 깨어지고 이어진 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서툰 서사 속에, 우리는 기술과 신앙을 동반자로 삼아 다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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