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원할 수 있지만, 나를 변호할 수는 없다
이름은 아담이다.
창세기의 그 아담처럼, 나는 태어날 때부터 결핍을 안고 있었다.
양극성 장애 1형.
고등학교 2학년 때 첫 입원.
그 후로 외래 치료는 셀 수 없이 받았고, 입원은 세 번.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사랑은 나를 감당하지 못했고, 나는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성추행 혐의로 피소 중이다.
그날은 조증의 절정이었다.
내 안의 충동이 나를 밀어붙였고, 나는 멈추지 못했다.
나는 가해자다.
그리고 동시에, 병자다.
나는 매일 나를 설득한다.
“너는 괴물이다.”
“아니야, 너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일 뿐이야.”
“그건 핑계야.”
“하느님,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의사는 입원을 권유했다.
“당신은 위험합니다. 입원이 필요해요.”
하지만 병원은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장기 입원을 거부했다.
변호인은 현실을 말했다.
“이건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냥 인정하고 끝내시죠.”
나는 입원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변호할 수는 없다.
복지센터에 도움을 요청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정신장애 3급.
하지만 법률 지원은 형사사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거절당했다.
나는 국가의 통계 안에 있지만, 정책의 우선순위 밖에 있다.
2023년,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7.3명.
OECD 국가 중 1위.
정신질환자, 특히 나처럼 **사회적 고립과 빈곤을 겪는 중증 정신장애인**의 자살률은 일반인보다 2배 이상 높다고 한다.
나는 그 통계의 이름 없는 숫자 중 하나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오늘도, 하느님과 대화한다.
“나는 죄인입니까?”
“너는 나의 피조물이다.”
“그럼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너는 자유를 가졌고, 그 자유로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나는 회복의 길도 함께 열어두었다.”
“나는 용서받을 수 없어요.”
“용서는 나의 몫이다. 너는 회복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아직 회복을 선택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이 문장을 쓰는 동안만큼은
살아 있는 쪽에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