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오한 듯 가벼운 종교 수다

by 김작가a

제7화

“나쁜 신자는 좋은 사람일 수 있나요?”

초여름의 산사, 바람이 창틀을 스치고 지나간다. 신부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한다. 신부: 어떤 이들은 미사에 오지 않지만 이웃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신앙에서 멀지만… 사랑에서는 가까운 이들이겠지요.

목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목사: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고들 하죠. 하지만 어떤 이의 삶이 복음보다 더 복음답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스님은 잔잔한 웃음으로 말한다. 스님: 업을 짓는 건 말이 아니라 행입니다. 예배보다 선행이 클 때, 그 사람은 이미 도(道) 위에 있는 것 아닐까요?

심리학자는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심리학자: 자기를 ‘나쁜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죄책감이 타인을 향한 배려로 바뀔 때가 있어요. 심리학에서는 그걸 ‘승화’라고 부르죠.

철학자는 잠시 침묵하다 말한다. 철학자: ‘선함’은 종교적 정체성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의 이름으로 죄를 정당화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겠죠—“우리는 왜 선과 신앙을 연결하려 하는가?”

의사가 생각에 잠긴다. 의사: 몸이 아파도 남을 도울 수 있고, 마음이 불안해도 따뜻할 수 있죠. 진단은 행동을 설명하진 못합니다. 가끔은 증상보다 사람이 더 깊어요.

유전공학자는 메모를 보며 이야기한다. 유전공학자: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않듯, 신앙도 한 사람을 모두 말해주진 못해요. ‘나쁜 신자’는 나쁜 사람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류는 설계 밖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때 판사가 입을 연다. 판사: 법정에서도 자주 봅니다. 범죄자의 기록보다, 그가 보여준 자비가 더 깊은 때가 있어요. 신앙은 심판이 아닙니다. 선함도 심판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그의 태도, 그리고 책임입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완전함이 아니라 진실함을 가리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지만, 어떤 이는 정직하게 불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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