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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Feb 18. 2024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이 선사하는 생활의 기쁨

고성에서 보낸 시간의 단편

낯선 환경에 익숙한 물건을 하나 둘 채워 넣으며 공간에 안정감을 더해보는 나날이에요. 여러 번의 이사를 통해 집은 물건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같은 공간이라도 손때 묻은 물건이 자리하고 있으면 방의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서울에서 이사 올 때 제 소중한 물건을 몇 가지 챙겨 왔어요. 가장 좋아하는 책 몇 권과 이런저런 메모를 적을 가벼운 노트, 일상에 늘 함께 하는 스피커, 주 식재료인 올리브유와 소금, 일상을 늘 함께 하는 또 다른 물건으로 티팟과 머그컵까지요. 이들이 없으면 제 생활은 삐걱이고 말거든요. 생활의 리듬이 되는 물건에 하나 둘 자리를 찾아 주며 속초 집에 정을 붙여 봅니다.


그런데 이사 첫날부터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요. 파스타 면과 올리브유는 챙겨 왔는데, 파스타 면을 삶을 냄비와 프라이팬이 없는 것입니다. 올리브유는 두 통이나 챙겨 왔는데 칼과 가위, 도마가 없는 부엌. 대략 난감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요. 서울에 두고 온 생필품이 너무 많아서 생활 속 빈 틈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모든 생활 가전을 서울집에 두고 온 탓에 속초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고성에서의 첫 휴무일, 오전 일찍 동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끊고 차에 탔습니다. 텅 빈 백팩과 장바구니 가방을 손에 들고, 서울집으로 향했어요. 도착 후 집안을 둘러보며 필요한 살림살이를 챙겼어요. 프라이팬과 냄비, 가위와 도마 등을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았습니다. 그러자 금세 무게가 늘어난 장바구니, 낑낑 거리며 들고 신설동을 지나 강변역으로 돌아갔어요. 다시 속초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자 그제야 터져 나오는 말, 아 배고프다. 집에 가면 챙겨 온 냄비를 꺼내 어떤 요리를 해 먹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어떤 요리든 해먹을 수 있는 장비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드는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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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을 오고 가며 하나 둘 로컬 친구가 생겼어요. 그러자 먹을거리도 저절로 늘어갔지요. 동네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자전거 앞바구니에 고구마가 들어 있곤 했습니다. 맛있는 집 김치가 먹고 싶은 날엔 교암길 73-1에 들러 묵은지 삼겹살을 1인분 시켜 먹고. 그리고 나면 아주머니가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 주신 김치 반 포기를 들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집 김치 먹고 싶을 텐데 없지. 들고 가서 먹어요. 배고플 때 또 와~’ 이렇듯 끼니를 챙겨 주는 로컬 친구가 늘어날 때마다,  서울에 갈 일은 점차 줄어들었어요. 생활의 터전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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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 처음 이사 온 날, 시내에 있는 하나로마트에 가서 장을 봤어요. 식재료를 몇 개 사 왔는데 그중 알배추가 있었습니다. 저는 알배추를 좋아해요. 하얗고 연 노란색의 알배추 잎은 하나 둘 떼어 국을 끓여도 좋고, 작게 썰어 겉절이를 무쳐 먹어도 좋습니다. 달큰한 맛이 일품인데 식이섬유가 많은 식재료라서 몸에도 좋아요. 알배추, 버섯, 애호박, 감자는 늘 저의 집에 있는 단골 식재료입니다. 이 친구들이 없으면 요리를 못 해요.


알배추 겉절이는 참 쉽게 만들 수 있어요. 작게 자른 알배추 잎에 소금을 치고, 마늘과 고춧가루 참치액젓을 조금 넣어 무쳐요. 소금에 절여진 배춧잎에서 물이 조금 나오면 배춧잎의 숨이 죽으며 맛이 들기 시작합니다. 김장 김치가 없어서 조금이나마 김치를 먹어보고자 만들어 본 겉절이었어요. 참치액젓은 김치의 고소함을 더해 주고, 통깨를 뿌려 한식 요리인 척 티를 조금 내보아요. 그렇게 맛이 조금 오른 알배추 겉절이를 된장찌개와 같이 먹고, 김에 싸먹으며 끼니를 때웠습니다. 만약 제가 나중에 해외에 나가 살게 된다면, 이렇게 알배추 겉절이를 가끔 해 먹지 않을까요.  


어느덧 속초집에는 생필품이 늘었습니다. 취향껏 사모은 물건이 제 자리에 하나 둘 안착해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고 있어요. 일상의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은 생활을 지탱해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니까요. 여러분에게도 반려 물건이 있으신가요? 혹은 나만 알고 있는 소소한 자취 레시피는요?


그게 무엇이든 나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기둥 같은 존재들이 여러분의 하루 구석 구석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길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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