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습관처럼 잠에 들기 전, 노트를 꺼낸다. 2014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쌓이고 쌓여 8권째를 넘어서고 있다.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여 있는 일기장을 볼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흐뭇해진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물건이 있다면 바로 일기장이다. 나의 보물 1호(?)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생 시절 일기는 학교 숙제였다. 초등학교 6년 내내담임선생님들께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꼭 일기 쓰기 숙제를 내주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어도 일기를 써야 했고, 쓸 내용이 없으면 빈칸을 채우기 위해서 동시를 짓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아도 돼서 기뻤다. 2년이 흘렀다. 중 3이 되는 해 1월 1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일기가 다시 쓰고 싶어졌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스스로 기록해나가고 싶었다. 새해가 찾아와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보고 싶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그렇게 나의 일기 쓰기가 시작되었다.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쓰기 싫더라도 매일 일기장을 펼치는 것. 한 문장, 한 줄이라도 일기를 쓰고 잠에 들기로 약속했다. 초반에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잠에서 깨어나 어제 일기를 쓰지 않고 잤던 것이 기억나서 허겁지겁 아침에 어제의 일기를 쓴 적도 있었다. 너무 지쳐서 침대에 몸을 파묻은 순간 일기가 생각나 졸린 눈을 비비며 다시 책상에 앉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 피곤하니 내일 일기에 써야겠다. 안녕~’이라고 딱 한 줄적고 일기를 덮었던 기억이 있다.) 어찌어찌해서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365일을 적어 나갔고, 일기장이 1권. 2권 마무리되어갈 때쯤 ‘일기 쓰기’는 나의 습관이 되었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하루가 끝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쓰다 보니 재미를 붙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은자리에서 몇 장씩 써 내려가기도 했다.
일기 쓰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생겼다. 거창한 내용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그날 있었던 일이나 들었던 생각을 적기도 하고, 영화나 책을 보고 느낀 감상을 적는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다면 직접 옮겨 쓰기도 한다. (좋은 구절을 옮겨 적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연필로 꾹꾹 눌러 가며 필사하다 보면 노트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도 깊게 새겨지는 느낌이 든다.) 가끔씩 시도 끄적여 보고,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표현해본다. 잘못한 일이나 주변인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한 날이면 자책하며 다시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 다짐하는 글을 쓴다. 글의 길이도, 글의 깊이도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나의 진실된 속마음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일기를 쓰다 보면 복잡한 생각도 차분히 정리가 된다. 내가 처한 힘겨운 상황을 천천히 적어 보고, 지금 심정이 어떠한지,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고민해본다. 그리고 잊지 않고 마지막에 꼭 써준다.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고, 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일기를 끝마칠 때쯤이면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일기를 쓴다고 문제가 ‘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기를 씀으로써 마음을 짓누르던 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기 쓰기는 내가 춤을 추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발레 노트를 적는 것처럼 그날 배운 것들이나 동작 구사를 할 때 생각해야 할 것들, 이 동작을 할 땐 이렇게 하면 잘 되더라, 이 부분에서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한다 등. 까먹게 되면 다시 읽어볼 수 있어서 좋고, 나의 춤에 대해 드는 많은 고민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다. 공연에 오르기 전 날에는 내가 추게 될 춤에 대해서 써보고,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되새긴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마음을 다잡는 나만의 루트라고 볼 수 있다. 또, 공연을 마치면 아쉬웠던 것들을 되돌아보며 다음 공연에서 보완할 수 있도록 리뷰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일기 쓰는 건 정말 재밌다. 일기를 쓰시는 분들이라면 다 아실 거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만의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역사책이 만들어지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말이다. 가끔 심심할 때면 몇 년 전에 썼던 일기장을 펼치고 쭉 훑어본다. 웹툰이나 드라마를 정주행 하듯이. ‘이때 내가 무슨 일을 했구나, 이런 생각도 했었어? 지금 돌이켜보면 별 것도 아니었던 일이 당시에는 왜 그렇게 괴로웠을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때 내가 공연을 어떻게 했는지, 누구와 놀았고, 만났는지, 내 상태가 어땠는지 세세하게 적혀있는 일기장 읽기는 그 어떤 소설, 드라마보다 흥미롭다. 글씨체가 바뀌어 가는 것도 굉장히 웃기다. 예를 들면, 일기를 막 쓰기 시작했던 초반에는 아주 반듯한 네모난 형태의 글씨였는데 최근의 글씨체는 조금 더 날렵해지고, 작아졌다. 그날 내 기분에 따라서도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
아직 8년밖에 쓰지 않았는데도 쌓여있는 기록들이 산더미인데 훗날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되었을 때는 어느 만큼의 일기가 쓰여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난 죽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2014년 1월 1일의 일기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쓴 일기까지 쭉 읽어볼 거다. 제목 <임선우>의 장편 영화는 어떨까. 벌써부터 설렌다.
이 글을 읽은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일기 쓰기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일기에 대한 글을 써보았다. 만약 내가 시간이 흘러 세상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해주고 싶다. ‘나’에 대해 깊이 알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인 일기 쓰기를.
요즘 나의 일기를 보면, 조금 속상하다. 지겨운 재활 운동이 힘들고, 하루빨리 복귀하고 싶다고. 무엇보다 ‘춤추고 싶다.’ ‘춤추고, 숨을 헉헉거리며 힘들어하고 싶다’는 글이 많이 적혀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부상 기간에 약간 지친 느낌이다. 괜찮을 거라고, 좋은 생각만 하자고 일기에 적어보지만 춤추고 있는 영상이나 발레단 동료 형, 누나들을 볼 때면 울컥한다. 언제쯤 이 긴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나의 일기장에 다시 발레 이야기가 적히는 날을 기대하며 잠에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