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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Nov 04. 2024

건축드로잉 덕후들이 만든 출판사

드로잉 매터 Drawing Matter 

영국 건축협회 건축학교인 AA에서 운영하는 북샵에 들렸다가 발견하고 보는 순간 너무나 소장하고싶은 욕구가 들어서 40파운드라는 거액을 주고 결국 구매했던 책이 있다. 글은 없고 건축 모형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인 책이었는데, 어찌나 매력적인지 아주 씹어먹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가 드로잉 매터 Drawing Matter 라는 그룹이었다. 드로잉 매터는 소위 건축 드로잉 덕후들이 만든 단체로, 학생과 실무자를 대상으로 전시, 출판물, 워크숍 등을 통해 건축적 사고와 실천에서 드로잉의 역할을 탐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25년동안 수집된 수천 점의 도면 컬렉션에는 16세기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드로잉 뿐만 아니라 실무자들이 쓴 글 또한 저널도 계절마다 발간한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너무 좋아서 나만 알고 싶은 그런 것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곳이다.


https://drawingmatter.org/


오픈스튜디오 (2024년 10월 26-27)

올 가을 바스 여행을 계획하면서 브루턴에 있었던 드로잉 매터의 아카이브 공간도 정말 가고싶어서 연락을 취했을 때는 이사 준비로 5월부터 이미 문을 닫은 이후여서 굉장히 아쉬웠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10월 중순에 런던 홀본으로 이사하면서 이틀동안 대중들에게 오픈했다. 런던에 있었기에 이런 공간의 실물을 영접한 것 같아서 타향살이 외로움을 견뎌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기존 공간도 (사진으로만 봤지만) 정말 멋있었는데, 새로운 공간도 너무 좋아서 눈에 다 담고 싶은 마음에 눈이 시큰거렸다. 자연스럽게 노출된 벽돌, 창가를 따라서 전시되어있는 건축 모형과 오브제들. 무심하게 툭 놓인 듯한 두 개의 드로잉 서랍장. 그 중 하나는 삐딱하게 틀어진 사랑스러운 각도. 투박한 듯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 감각적이다.

런던으로 이주한 드로잉 매터의 아카이브 공간
아카이브 공간에서 수다 중인 사람들
영국 건축가들은 좋겠다. 드로잉 매터가 있어서.

영국에 산지 1년밖에 안되었지만, 가히 문화 종주국이라 불리우고 많은 예술계 학생들이 영국들 찾는 이유를 깨닫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영국은 덕후들을 존중한다. 영국에서는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사회적 가치로 인정받고, 그런 덕후들이 만들어내는 깊이 있는 문화가 예술과 디자인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천이 된다. 특히 드로잉 매터 같은 플랫폼은 건축을 콘텐츠로, 그 중에서도 드로잉의 예술적 힘을 널리 알리며, 젊은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이처럼 덕후들을 존중하는 문화는 새로운 창조성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게 아닐까. 이런 드로잉 매터를 가지고 있는 영국 사람들이 부러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 

창가에 놓여있던 오브제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것들


나에게 드로잉이란

나는 입시 미술은 중학교 3학년때부터 했는데, 소묘, 정물수채화, 발상과 표현, 사고의 표현 등등 안해본 입시 과목이 없다. 고3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린채 낙방하고 재수하느라 그 힘들다는 미대 입시를 두 번이나 했었다. 이 정도면 가성비도 참 떨어지고 재능도 없다는 시그널이었을텐데 꾸역꾸역 미대 진학을 했다. 내가 그린 그림 장수로 치면 족히 만장은 넘을 텐데 입시 미술의 여파인지 나는 드로잉에 정이 아주 똑 떨어졌고, 대학교 진학한 후에는 거의 손을 놓았다. 지금도 누가 나보고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아무도 미대나온 사람인지 상상도 못하게 졸라맨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드로잉'은 나에게 넘지못할 산인 것 마냥 얄밉다


그런 나에게 올 것이 오고야 말았는데, 이번에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튜터가 Memoir 라는 드로잉 작업을 시켰다. 사이트에서 발견한 부분들을 손으로 드로잉해서 기록하는 작업이다. 두터운 종이를 사서 떨리는 마음으로 4B 연필을 쥐었는데, 손이 기억하고 있는 연필의 사각거리는 감촉이 생각났다. 그래, 이 맛이지. 사각사각 그리다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생각이 정리되는 과정들이 즐거웠다. 드로잉의 힘을 느낀 순간이다. 이런 순간들은 드로잉으로 나의 내면을 탐색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매개체라는 걸 깊이 실감하게 한다. 

나의 Memoir 작업들



드로잉매터 아카이브 공간에 다녀온 것 뿐인데 많은 것들이 상기된다. 부단히 평범하게 살기 위해 창작의 길을 외면하고 많은 타협을 하며 살아온 나지만 부지런히 작업들을 남겨 언젠가 꼭 이런 공간을 가지고 싶은 꿈을 꾸게 한다. 다시 꿈을 꾸게 해줘서 고마워요, 드로잉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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