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11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며칠, 고요한 거실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 아버지는 퇴근 후 저녁 식사와 함께 늘 가벼운 반주를 즐기셨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그 습관에 동참하지 않았고,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루틴이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몇일간의 부모님부터로의 부재라는 자유 속에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져녁과 함꼐하는 맥주 한 캔이었다. 경악스러웠다. 이 생각은 의식의 표면이 아니라, 심연 아래 가라앉아 있던 무의식의 퇴적층에서 부유해 올라온 것이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 계속 주변 타인의 습관이 내 안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포로 다가왔다. 무의식은 이토록 잔잔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잠식한다. 그 무형의 지배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루틴이라는 의식적인 방어기제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실용적이지 않은 개념들에 의문을 품는 성정을 가졌다. 내 지식의 한계치까지 벽을 두지 않고 끝까지 파고든 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정리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무지한 채 편견 속에 안주하는 것보다, 차라리 사유의 끝에서 마주하는 공포가 낫기 때문이다.
오늘 내 사유의 칼날이 닿은 곳은 **'양심'**이었다.
양심은 사회가 개인의 내면에 박아 넣은 현대판 CCTV다. 태어난 후 끊임없이 주입되는 이 규칙들은 미래에 태아의 뇌에 심길 전자칩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양심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목줄을 찬 채 사회의 노예로 길들여진다.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활보하거나 무단횡단을 일삼는 이들을 보며, 나는 그들을 '추노를 감행한 도망 노비'에 비유해 보았다. 그들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일탈했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충동이라는 또 다른 주인에게 예속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발견이었다. 나는 그동안 양심을 잘 지킨다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껴왔다. 하지만 그 실체를 직시하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것은 마치 주인에게 길들여진 강아지가 스스로의 '순종함'을 뽐내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가 설계한 시스템에 순응하며, 그 순응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던 것일까.
하지만 사유를 멈추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가 보았다. 양심이 사회적 목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역설적으로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이토록 쾌적하고 안전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타인들 역시 각자의 목줄(양심)에 묶여 서로를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목줄의 존재를 인지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목줄의 존재를 모른 채 끄는 대로 끌려가는 자는 그저 애완동물이지만, 그 존재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기능을 이해하는 자는 '관찰자'가 된다.
나는 이제 조금 더 침착해졌다. 예전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죄'의 메커니즘이나, 똑똑한 이들이 논하던 무언가가 조금씩 손에 잡혔다가 사라진 기분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간단한 행동들, 즉 공통의 습관을 최초로 설계하고 퍼뜨린 선구자들은 얼마나 강한 자아를 가졌던 것일까. 그들은 아마 자신의 이상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인류의 무의식에 각인시킨 거인들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것에 끊임없이 '왜'를 던지는 행위는 스스로의 행동을 더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내가 '길들여진 존재'임을 깨닫는 꺼림칙함을 마주할지라도, 무지 속의 평온보다는 자각 속의 불편함을 택하겠다.
미래의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2026년 1월 11일의 나는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