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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an 29. 2023

영화 '올드보이' 리뷰

Oedipus

관객이 사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저 설명만으론 좀 모자라는가 보다. 15년간 갇혀 있었다는 목소리론 부족한 감이 있는지. 맨주먹으로 빈 벽을 피가 나도록 두드리거나, 깨진 거울 조각으로 손목을 긋거나, 자기 살에 잉크 섞은 철사를 찍어 넣어 세월을 새기거나 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갇힌 세월에 대한 증오 또한 그의 증언만으론 그 호소력이 다소 빈약할 수 있겠다. 등 복판에 매달린 칼자루를 뒤로 하고 긴긴 복도를 누비며 찰나의 동선도 놓치지 않고 우격다짐을 찍어 누르는 둥, 이를테면 타격이 타인의 피부와 접촉하는 사태를 지나, 상대의 살을 그의 뼈에 눌러 짓이기는 마찰음과 함께, 그리하여 장도리는 치아로 하여금 잇몸뼈를 찢고 나오게 강제한다. 마침내 관자놀이를 관통한 총알이 비로소 엘리베이터 거울을 산산조각 내고, 손에 물린 가위가 기어코 주인의 혀를 조금씩 재차 씹어 썰어내는 양으로, 관객은 보복에의 감상을 체험한다.

예의 연출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한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수렁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프로이트가 인간 욕동의 가장 근원적인 충동으로 "성 본능"을 지명한 일도 같은 맥락에서가 아니었을지. 말하자면, 어린아이도 욕망을 소유하는 양으로 어른도 마찬가지일 텐데. 온갖 다양한 종류의 욕망을, 논리적 양식으로 가져오기 전에 우선 자체 구조를 살피기 위하여는 하나의 언어로 통일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그가 마주했던, 그리하여 그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던 무수한 사례를 뒤집어 소급해 보면 해당 사건들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가 겪은 임상들은 그가 속한 분과에 따라 분명 정신에 기반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현실에 영향을 끼칠 만큼 극단적일 수밖에 없었을 터다. 곧, 그가 목도한 인간 욕동은 이상적이라기보다 물리적이고, 그렇게 구체적 개개의 욕동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무엇보다 피와 살, 뼈와 힘줄에 접합되어 있지나 않았을는지.

그리하여 "굳이" 다소 자극적인 단어인 "성 본능"을 인간의 근본 충동의 명함으로 채택한 게 과연 얼마만큼의 부작용(이를테면 스스로 고상하고자 애를 쓰며 애정결핍과 자존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일상의 소유자들이 겪을 모욕감)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는지 과연 그 누가 판단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누구도, 결코 알지 못하는 걸 욕망할 수야 없으리라. 예컨대 누군가 감히 알지 못할 신비로움을 욕망한다 연출(표현)하더라도, 그 또한 다만 흔해빠진 저기 저 "신비롭다 자신하는 이미지"일 뿐 아니겠나. 또한 달리 말해, 모든 욕망이 성 본능의 변형이라는 가설은 거꾸로 성 본능을 특정한 욕망일 수도 없게 만들 테니. 아이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만 애착을 가지는 게 아니다. 그게 인형일 수도 있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달리 또 터무니없는 이미지일 수도 있을 텐데.

따라서, 의도적으로 "올드보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라 해독해 본다 해도 그리 매끄럽지 않은 건, 어쨌거나 해당 서사가 (오히려) 계속해서 근친상간에만 천착하고 있기 때문 아니던가. 여기서 아버지 살해는 도무지 찾기가 힘들지 않은지. 요컨대, 렌즈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인지, 혹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지(둘은 분명 다를 모양인데)에 따라 살피는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겠으니. 분명 근친상간은 자극적인 소재고, 이를 상대역(이우진)에게도 주연(오대수)에게도 계속해서 맞물리게 서사를 구성하는 건 가히 충격을 전달하는 데 실효적이긴 하겠다(또한 애써 오이디푸스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달리 독특한 해설도 다양하게 가능할 성싶고).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 살해를 찾기는 좀 힘들어 보인다(굳이 꿰맞추지 않는다면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아버지 살해)로써의 아버지는, 어쩌면 생물학적 아버지보다는 추상적인 셈인데. 도리어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 권력자의 은유이며, 사회를 보증하는 낡은 기성 권력의 비유로써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고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주장하는 아버지 살해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오래된 권력을 자랑스럽게 상속해 왔다는 기성의 기세등등한 권위가 한낱 주먹구구와 과시로 작동한다는 걸 깨닫는 사건(실망)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종종 사춘기 혹자는 어쩌면 위대해 보였던, 다른 의미로는 거대해 보였던 부모가 한낱 나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던가. 생각 이상으로 체계 없이 굴러가는, 또 언젠가 위대해 보였었던 오늘의 저 볼품없는 사회가, 그리하여 낱낱이 뜯어보면 존경할 이 하나 없는, 그래서 그나마 존중으로 타협을 보는, 그러므로 억지로 근근이 이어왔던 모든 기대가 끊임없이 얄팍한 실망으로 수렴하는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겪어왔나 말이다. 애착이자 존경의 축이 실소와 함께 거듭 붕괴하는 일상들, 그래봐야 누구도 빠짐없이 모조리 한낱 심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폭로들, 더 높고 넓고 깊은 시야 따위의 소위 통찰이라 자칭하고자 애를 쓰는 알량하고 빈약한 과시들, 그리하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가 설명해도 1에 1을 더하면 2라는 자명한 이치로만 세계를 살펴야 하는 덕택에 붕괴한 청사진의 폐허에서 사춘기 개인이 우울증에 걸리는 건 필연적 절차 아니었나. 마침내 그러한 기대가 실망으로 되돌아오는 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고. 어릴 적 그토록 꿈꾸었던 미래가 이제 기껏해야 지금 멈춰있는 자리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또 눈앞의 경멸스러운 혹자의 내면이 이토록 쉬이 읽히(거나 읽힌다 착각하)는 건 언젠가 스스로 같은 욕망에 기대어 연명했던 까닭이라는 등등의 자기혐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의 맥을 확실히 끊을 만치 강렬한 경우는 다행히도 희박한 모양이다.

이렇게 살피면, 성에 대한 그토록 충격(자극)적인 해설들도 그저 1차원적 권력에 대한 헛된 '상상'적 전리품(과시) 일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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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기능은 그것이 봉사하는 세 기관의 요구를 통합하고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 자아는 또한 초자아에게서 자신이 추구하려는 모델을 보고 있다는 말을 우리는 여기에 덧붙여야겠다. 이 초자아는 외부 세계의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이드의 대변자이기 때문이다. 이드의 리비도적 충동의 첫 번째 대상, 즉 부모를 자아 속에 내투사시킴으로써 초자아가 생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대상들과의 관계가 탈성화(脫性化)되어 직접적 성적 목표에서 벗어난다. 오직 이 방식을 통해서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다. 초자아는 내투사된 사람들의 기본적 특징들, 즉 그들의 힘, 엄격함, 감시하고 벌주는 태도 등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자아로의 유입과 더불어 발생하는 본능의 분열 덕분으로 그 가혹함이 증대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초자아 ― 자아 속에서 활동하는 양심 ― 는 업무 수행 중인 자아에 대해서 혹독하고 잔인하며 무정한 존재가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칸트의 정언 명령der kategorische Imperativ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직계 후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 /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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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은 이 사랑의 본능들이 갖고 있는 주요한 특징과 그 기원 때문에, 그것을 성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명칭에 모욕감을 느끼고, 정신분석학을 <범성욕주의Pansexualismus>라고 비난하여 앙갚음을 했다. <섹스>를 인간성에 굴욕과 창피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좀 더 점잖은 <에로스>나 <에로틱>이라는 낱말을 사용해도 좋다.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수많은 반대를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소심함 때문에 양보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물러서다 보면 결국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는 말에서 양보하지만, 나중에는 내용에서도 조금씩 양보하게 된다. 성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에로스>라는 그리스 어 낱말은 무례함을 누그러뜨릴 수 있겠지만, 결국 독일어의 <Liebe(사랑)>를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양보할 필요도 없다.

프로이트 / 문명 속의 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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