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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Sep 01. 2023

영화 '오펜하이머' 리뷰

영감은 기본적으로 선별된 현실이다. 우리는 모든 현실에서 영감을 받지 않는다. 어떤 현실만이 영감인가? 우리 심연의 현실(진실)과 섬세하고 정확하게 맞아들어간 외부 현실(특정한 대상이나 상황 등)이 그것이리라. 물론 우리의 현실이 우리 내면이 투사된 결과일 리 없다. 차라리 우리는 우리 영감의 대상이 아닌 현실을 그 반대보다 훨씬 더 많이 목도한다. 그러나 걔 중에서도 마치 우리 내면이 투사된 양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 듯한 현실과 ‘우연’히,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순간에야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도 몰랐던 심연의 진실과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영감’은 우리 내면을 ‘정확하게’ 추리할 수 있게 도와주는 유용한 ‘수단’이다. 그렇게 혹자는 자기 심연을 추리하여 작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영감이 그러하듯, 그가 창조한 작품 중에서도 그 자신의 심연이 잘 반영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을 터다. 말하자면 더 반영된 것, 덜 반영된 것, 반영되지 않은 것, 반영된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아닌 것, 나아가, 반영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사실 자기도 모르게 반영된 것 등, 정확성에 관한 정도들이 나열될 수 있겠다.

우리는 이 ‘정확성’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우리는 우리 말이 진실이라는 첨언을 묵음 처리하여 덧붙이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문장조차,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그 명제만은 참이어야만 그가 하던 나머지 말들이 거짓이 될 수 있다. 그처럼 의사소통 자체에서 이미 ‘정확성’은 무언의 약속처럼 담보된다. 누구나 무언가 추구할 수 있지만, 이 정확성 위에서 추구되어야 최소한 의사소통에서라도 그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은 다르다. 이상은 정확성보다 정당성에 그 초점을 둔다. 유아의 거울상 이미지는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바, 소유하고 싶은바만 염두에 둔다. 그게 현실로 이룩될 수 있는지 여부는 관심이 없는 단계의 이 ‘이상’은 언젠가 이념(이데올로기)으로 발달할 씨앗이기도 하다. 이상으로서의 거울상 이미지나 열정적인 이념은 현실에 달성 가능한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러니까 입증책임 없이 그 ‘정당성’만을 주제 삼아서라도 그 논쟁이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엔 도덕적 판단의 여지만 생긴다. 이 정당성이 정확성과 너무 괴리되어, 이제 현실이 어떤가와 상관 없이 그 의도가 그저 규범적으로 선한지나 다른 여타의 이념에 들어맞는지만 중요해지는 순간, 소위 ‘정확성’에 대한 감수성은 은연중에 말소되고 당사자의 현실 자체에 대한 고려도, 또한 소위 ‘정확성’에 대한 죄책감도 아울러 말소된다. 이제 문제는 과정도 결과도 아니라 어림된 가상의 ‘의도’ 뿐이다. 그것도 제삼자가 ‘굳이’ 넘겨짚은 이 가정된 ‘의도’에 대해, 다시 예의 제삼자가 찬양도 처벌도 ‘굳이’ 시도하고 싶을 수 있으리라. 거기 수천 번의 찬양으로 부양되던 인생도 단 한 번의 응석 어린 처벌(인민재판)로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기도 한다.


다시, 유아의 거울상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이념)는 어떻게 발달해 갔는가? 유아는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내세우고, 원하는 이미지로 상황을 설정하고 그 ‘거울상 이미지’ 속에 영영 살 것처럼 살면 될 일인데, ‘이념’ 속에선 그렇게 살 수 없다. 유아는 성장하면서 원하는 이미지와 그걸 투사하고자 하는 현실이 얼만치나 다른지 그 ‘정도’를 알게 되고, 그런 현실을 원하는 이미지(이상)로 고치고자 하는바, 노력이 쌓이고 쌓여 그 결과 추상적이고도 정교한 이념이 탄생하곤 하지 않나. 이념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이상을 도래하게 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이고, 그런 의미에서 애초부터 일종의 현실화에 관한 몽상이며, 이 몽상을 현실로 이룩하기 위해 유아에서 성장한 이 개인이 선행적으로 시도하는 건 일단 이상이 아닌 현실 자체에 대한 인정이며 분석이자 그처럼 현실에 이 이상(이념)을 도래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이 ‘실천’ 과정에서 이념은 그 자체 초기 (거울상) 이미지로 남을 수 없도록 추상화되는데, 당사자는 물론 누구도 이 ‘실천’의 결과(미래 현실)를 도무지 알 수 없고, 심지어 이 ‘실천’ 속 무수한 현실적 도전들이 이념 자체를 계속해서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뒤바꾸기도 한다. 그 와중에, 그게 거울상 이미지에 대해서든 이념에 대해서든 마찬가지로 그저 어림된 ‘의도’만 판단되어 처벌될 뿐이다. 그와 같이 이념 자체는 거울상 이미지의 발달된 형태에 불과하겠으나, 그처럼 거울상 이미지와 이념의 차이는 다만 1차원적 이미지와 추상화된 개념인 정도가 아니라,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지까지 가기는 해야 한다.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우선 당면한 현실을 인정해야 하기는 하니까.

그렇게 (이를테면 부조리한) 현실을 진정으로 바꾸기 위해 현실을 인정하고자 한다면, 그제야 ‘정확성’에 대한 감수성이 다시 부활한다. 애초에 유아적 거울상 이미지 속에서도 예의 ‘정확성’에 대한 감수성의 씨앗이 잠들어 있긴 했다. 유아가 소위 ‘정확한 현실’이 무엇이고 이를 과연 추구해야 할지 여부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더라도, 그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와 다르다는 정도는 알았던 까닭에 ‘거울상’을 ‘굳이’ (‘투사’하고 ‘내사’하여) 상상해 냈을 테니까. 우리의 이상은 거울상부터 이념을 거쳐 그 ‘정확성’을 고도화(발달)한다. 정교화될수록 관념은 현실에 더 커다란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역설은, 소위 공상이라는 관념적 현상조차 하나의 현상으로서 이런 현실의 일부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다른 이의 ‘믿음’을 참조해 ‘믿는다’.

고로 이념을 극복하는 과정은, 거울상을 극복하는 과정을 더 멀리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더 참조하면 그뿐이리라. 그러나 이념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이념을 일단 가져봐야 할 터다. 단계를 밟아야 지나갈 수도 있지 않겠나. 그처럼 이 모든 게 ‘정확성’을 더욱 참조하고자 하는 과정이라면, 우리가 이 ‘정확성’을 참조하고자 하는 감수성은 이미 사전적 의미의 ‘도덕’일 리 없다. 그러므로 유년기 거울상으로부터 이데올로기(이념)를 거쳐 끝내 이상을 텅 비운 현실 인식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발달이 가진 ‘정확성’에 대한 감수성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죄책감’의 역량은, 저기 저 사회적 도덕과는 그 상관관계가 크지 않을 성싶다.

허나 우리는 우리 외부의 현실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내면의 현실에 관해서도 종종 틀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조차 늘 관찰하고 있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각자가 가진 ‘정확성’에 대한 감수성이 사회적 시류와 관련 없이 말하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주의력을 자기 내면에만 영영 매달 순 없다. 마찬가지로 특정 외부 현실에만 영영 매달 수도 없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 대해서조차) 늘 틀린다. 그러나 이를 감수하고, 우리는 우리의 주의력을 관념적 ‘정확성’까지 포함한 모든 요소의 ‘정확성’에, 그리하여 그 대상이 우리의 내면이든 외부든 거기 포함된 미묘한 저 ‘정확성’에 끊임없이 매달 수는 있지 않을까. 틀리는 걸 지속적으로 감수하고서라도.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로 ‘정확한’ ‘죄책감’은, ‘정확성’이란 감수성에 늘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감수성’인 셈이다. 그리하여 두 감수성이 마침내 지시하는 윤리는 사회적 도덕이 아니라 직관(영감/정확성/필연성의 최소 단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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