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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Sep 18. 2023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리뷰

자아의 최초 규격, 손쉽게 동일시하고자 하는 저 '이미지'는 최초의 타인(가령 가족)으로부터 기대되고 강요되는 방식으로 주입되곤 하지 않았던가. 종종 유아는 자기 자신을 당 '이미지'에 짜맞추기 위하여 그토록 노력한다지만, 우리 삶은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되어 영영 반복되기엔 너무나 복잡할 양이다. 그렇게 최초의 이미지는 언젠가 이념이 되고, 다시 언젠가 마침내 자기 이상을 텅 비운 이념이 현실에 최적화되거나 현실을 바꾸거나 할 수도 있을 텐데. 우리 자아상을 그리 덧입은 평면적 이미지가 점차적으로 더 복잡해져서 추상적이고 경험적인 시행착오를 입체적으로 거치며 고도화되는 동안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요소는 예의 '시행착오' 자체의 운동성이리라.

이를테면 어떤 사물도 던져본 적 없는 아이는 사물을 던져보기 전까지 던졌을 때 과연 어떻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현실을 얼마나 훼손할 수 있을는지 알고자 하는 탐구에서조차, 그리하여 현실이 얼마나 자기 영향력 아래 소속되어 있고 그래서 무얼 조심해야 할지 알기 위해서조차 일단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가고자 시도하는 시행착오의 순간들을 겪어야 할 테니. 그가 시행착오라는 직접적인 경험을 어느 정도는 겪어야, 차후 따라붙는 소위 연장자들의 '경험적 지식'에서 '경험'을 '추론'하여 다만 흐리멍덩한 복종이 아닌 납득을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해당 '시행착오'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삶에 관한 최초의 실험이며, 차후 추론의 자료가 되는 이 시도들은 그 실험들이 벌어지는 상황이나 관찰자 등에 따라 종종 '공격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허나 다른 상황, 다른 대상이 덧붙을 적이면 한 가지 같은 행동에 다른 결과가 산출되기도 할 텐데. 그의 시행착오가 혹자에게 상처를, 어떤 현실에는 훼손을 가져올 수 있기는 하다지만 이 시행착오를 통해 그는 해당 '작동'이 어떤 상황과 뒤섞여야 '공격성(폭력)'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 분별하고 분석할 수도 있으리라. 예컨대, 이 추론의 기초 자료로써의 경험을 박탈하면 같은 행동이 언제는 공격성이고 언제는 아닐 수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없는 채 그저 평면적인 명령을 반복하는 연장자의 목청을 되뇌며 성숙을 다만 연기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최초의 타인(가령 가족)으로부터 강요된 자기 자아 이미지가 다시 예의 '공격성(의 이미지)'을 내면에서부터 비난하기 시작하면, 무슨 '작동(시행착오)'이 폭력(공격성)으로 번역될 수 있을는지도 전혀 어림할 수 없는 채 혹시라도 공격성으로 번역될지도 모를 저 모든 시행착오(작동) 전부를 덮어놓고 모조리 '우선' (상상하여) 검열하는 데 이르기도 한다. 요컨대 여기 뒤틀린 도피로서의 '검열'은 죄책감의 외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나, 그와 한참은 다를 모양이다.

이와 달리 자기 '공격성'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작업은 그 과정적 시행착오 위에서 자기 '작동'의 효과를 추론한 결과로써의 죄책감, 그러니까 작동의 효과가 '정확히'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를 토대로 연역된 '죄책감'을 아울러 산출한다. 요컨대 작동 자체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당 작동을 하나의 요소로 포함한 총체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을 기초로 하는 이 교정작용(죄책감)은, 앞서와 같이 (강제로 주입된) 평면적인 자기 이미지의 명령, 그러니까 소위 공격성(폭력)으로 번역될 수도 있을 저 모든 '작동'을 '미리' '검열하(고자 종종 시행착오-지능을 정지하)라는 명령(유사 죄책감)'과는 그 뿌리를 달리한다.

다시 말해 자기 공격성(시행착오)을 겪어 마주하여 분석하는 죄책감이 현실의 효과를 토대로 연역(여기서 부모를 비롯한 여타의 관찰자들조차 세계관의 명령권자나 해설자가 아니라 그저 이 '정확하게' 감지되어야 할 현실의 일부에 불과해야 하리라)된다면, 평면적인 자기 자아상이 예의 공격성을 부정하는 까닭에 그와 관련된 작동 양상까지 덮어놓고 미리 모조리 '부정'하고자 하는 검열(연극적 상상)은 자아상의 붕괴를 피하기 위해 겪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은 셈 치고 겪은 상태를 연기하는 '유사 죄책감'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저 이미지에 고착되어 동어반복의 당 이미지 외의 내면이나 외부를 타진하지 못해 그저 억압된 작동(시행착오)들이, 고로 저 시행착오(작동들)에 포함된 공격성들이 끝끝내 내면을 갉아먹는 이 유사 죄책감에 질식하기를 반복하는 건 소위 '공격성'이 자기 내면에 한 올도 없다는 저기 저 덧없는 '부정(연극적 도피-자기 암시)'에의 거듭된 시도 속에서만일 셈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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