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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PROJECTION

by 이채

우리가 우리 삶을 늘 예상한다는 차원에서는,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미래다. 한편 우리가 지나온 삶을 기억을 통해 회상하는 한에서, 나아가 우리가 지나온 온갖 예상들을 기억을 통해 회상한다는 한에서, 또 우리의 덧없는 가정(만약)들과 심지어는 상상들이 우리의 기억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기억은 하나의 과거다. 나아가, 다시 우리가 우리 삶의 지금을,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다른 장소를 실시간으로 예상하는 한에서는, 또한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일어나는 (혹은 지나간) 사건 위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예상하게 된다는 한에서, 우리가 직접 손에 움켜쥐지 못한 무수한 조건들을 추론하여 고려한 상태에서 실천한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현재는 미래를 향하고, 또 현재 자체도 어느 부분에선 하나의 미래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누군가 현재가 예상하는 건 미래고 현재가 회상하는 게 과거라 그토록 쉬이 말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의 앎은 늘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구성하는 한에서, 우리가 만약 우리 기억에서 뭔가 꺼내기 위해 다른 기억을 토대로 어떤 기억을 재구축한다면, 그리하여 틀릴지도 모르는 어떤 과거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면, 그렇게 구축되는 기억은 과거 아닌 미래로 간주할 수밖에 없지 않나.

우리의 회상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할 수도 있다. 또한 너무 자명하다 믿었는데, 어느 날 얼마든지 사실과 다르게 확인될 수도 있다. 미래 또한 너무나 자명하여, 우리가 어제를 기억하는 만큼이나 쉬이 예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만치 자명하게 보이는 일이 다음 순간에 당연하게 실현될 수 있다. 이를테면 과학의 무궁하고도 낙천적인 앞으로의 발전 이전, 작금의 우리 인간은 모조리 죽는다는 사실이 어찌 자명하지 않을 수 있겠나? 우리 각자가 어떻게 죽는지는 불확실하더라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없이 자명하다.

우리의 정신은 그렇게 자명한 데서 불확실한 데로 나아간다. 우리의 사유는 확실한 명제들을 토대로 자명하지 못한 모호한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허나 자명한 모든 것들은 과거(필연성)에 속하고 모호한 모든 것들은 미래(가능성)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면 더 이상 미래와 과거의 이야기는 시간 개념이 아니게 될 터다.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관념을 그런 의미에서의 과거(필연성)와 미래(가능성)로 나누어야 '현실'을 추론할 수 있으리라.

가령 동물들이 우선 '예상'해야만 하는 건 일종의 위험이고 보면, 어쩌면 저 모든 불확실성을 정복하고자 애를 쓰는 인간의 지성은 그저 과잉된 생존 욕구에 비롯된 결과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반드시 언제나 결과가 원인에 복속되는 건 아니므로, 오늘날 우리의 지성이 생존 욕구에 연원했더라도 그렇다고 그저 생존만을 위해 작동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건 섣부른 일일 터다. 어쨌든 우리는 (간혹 우리 자신도 몰래) 추론한다. 늘, 끊임없이.

예컨대 저기 저 흔하고 흐릿한 공상들이 언젠가 유효한 추론이 되는 건 오로지 예의 '과거(필연성)'와 '미래(가능성)'를 명확하게 분할하고 나서일 테다. 확실한 사실들에 뿌리를 두고, 불확실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예상하여 확실하게 만들고자 하는 영영 끝나지 않을 노력은 예의 갱신되는 과거와 미래의 '분할'에 기초해야 할 테니. 이는, 우리 관념이 지목하는 요소 중 확실한 사실과 불확실한 예상을 구분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추론을 시작할 수 있는 까닭이다. 설령 끝내 그 추론이 유효하지 못하더라도, 이 경로 위에서 우리는 추론 능력을 점차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추론의 전제는, 그러니까 우리 관념을 확실한 과거(필연성)와 불확실한 미래(가능성)로 나누는 건,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적 현실(과거-필연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행위이며, 오로지 추론(상상)된 관념(미래-가능성)으로만 세상이 상대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가정을 포함하며, 마찬가지로 '추론(상상)된 관념(미래-가능성)' 없이 오로지 '절대적 현실(과거-필연성)'로만 우리의 세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가정 또한 포함할 터다. 그러므로 세계는 관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듯, 관념 없이 구축될 수도 없다. 차라리 관념 또한 실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동시에, 부분적인 실재를 감지하고 분석할 수 있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관념이 실재 전부를 모조리 인식할 수야 결단코 없을 테니까.

그렇게 회상 또한 둘로 나뉜다. 확실한 회상과 불확실한 회상, 그처럼 명확한 실재와 모호한 가상(상상)으로 나뉜 회상을 일치하도록 애쓰는 행위가 곧장 우리의 회상을 점차 정교하게 가공하며, 따라서 이 과정 자체가 다름 아닌 삶일 모양이다. 우리 삶의 과정은 목적이 새로 탄생할 때마다 다시 갱신되지만, 우리네 목적 또한 과정에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는가에 따라 다시 갱신될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회상 가능한 세계에서 회상 불가능한 세계로 나아가며, 끊임없이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한 회상에 편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다.

설령 불가능할지라도 영원히 사는 듯한 태도로 유한한 삶을 계획하여 밟아가는 삶의 불가능한 가능성이 이미 우리 삶 아니던가. 그처럼 상대적 관념은 절대적 현실을 각기 상대적으로 인식하겠으나, 그렇게 우리네 감각이 상대적이라 하여 우리 감각의 대상이 되는 대상이 상대적일 순 없으므로. 우리 관념은 절대적 실재를 자기 한계만큼 다르게 인식할 뿐이겠으므로. 그처럼 우리네 관념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우리 관념의 최초 매개가 되는 감각이 그토록 한정적인데도, 우리는 우리 삶이 요구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저기 저 절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방식으로 (종종 우리 자신도 몰래) 삶을 이룩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애쓰는 노력뿐 아니라 '타인들의 노력(문명)' 또한 우리가 인식하는 하나의 요소로 삼으며 회상을 짜깁기 하기도 하고. 우리의 예상 자체도 우리가 예견하기 위한 조건의 일부로 간주하여 하염없이 부분으로 탈락시키며, 그렇게 목적지(미래)로 나아가는 와중에 여기 모호한 현재가 스쳐 지나가리라.

그러므로 저 관념의 반대급부로써의 실재는, 회상 가능한 확실성이 모조리 빠져나간 실재이며, 관념으로 포섭될 수 없는 실재이고, 또 이 관념이 따르고 이끄는 질서로써의 언어가 또한 포섭할 수 없는 실재이므로, 그 누구의 어떤 작품도 다다랐다 자청할 수 없는 형태로 그저 다다르고자 애쓰는 점근선으로써의 실재겠다. 거기엔 우리가 늘 만나는 이중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실재, 도달 불가능하지만 이를 감내하고 추구해야 하는, 따라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간주하여 재차 추구해야 하는, 그러나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추구 불가능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자리한다.

주요한 건 이 불가능한 실재에 완전히 다다랐거나 아예 포기했거나의 여부가 아니라 '얼만치'나 도달하였는가, 반대로는 포기된 무효한 관념으로 '얼만치'나 도피하곤 하는가 등 '정도'의 문제겠다. 따라서 예견 불가능한 낯선 세계를 얼마나 탐구하는가, 친숙한 세계를 얼마나 놓아 잃어버릴 수 있느냐, 고로 저 부당하고 폭력적인 실재에 얼마나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느냐의 문제리라.

그렇게 정당한지의 여부보다 정확한지를 우선 확립해야 하는 사유 활동이 가령 소위 정당성을 그 주제로 다룬다손 치더라도, 거기 그 정당성이 얼마나 정확하게 추론되어 구성되어 다루어지고 있는지가 가장 기본적인 설득력을 담보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회상이 아닌 사유는 그만치 낯선 무엇을 희구하는 까닭에, 그 당사자 스스로에게 늘 부당하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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