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각적으로 확인한 대상을 기억하여, 촉각적으로 다시 확인하기도 한다. 한편 우리 시각이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의 촉각은 우리에게 하나의 시각이 될 수도 있다. 더듬어 찾은 길이 그렇게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가 되듯, 한눈에 살핀 표면이 무엇보다 거칠게 보이는 등 촉각적 이미지가 제시될 적도 적지 않다.
지각하는 과정의 귀결점은 하나의 상(이미지)이 맺히는 정도가 아니라 지각 직후 이를 기억으로 우리 자신에게 제시한 후, 다시 이 기억을 다른 기억과 함께 포함하여 회상하도록 하는 우리의 의식인 모양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것을 곧장 다시 기억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인식하는 모양이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 순간 현재를 지각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셈이리라. 그리하여 의식은 지각 그 자체를 느끼는 과정 자체 따위가 아니라 방금 아주 짧게 지각된 대상을 다시 회상한 결과로써, 느끼는 과정 자체에 개입하는 게 아닌 그 결론을 덩어리진 회상이라는 누적된 기억에 포함하여 다시 소환한 결과물 아니던가. 실로 지각하는 감각 자체와 가진 기억을 구분한다면, 판단의 전제가 되는 의식은 무수한 기억의 종합에 가깝지 저기 저 기능적인 지각과는 꽤나 먼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가령 어떤 지각의 감상이 너무 위대하다 과대평가하며 이것이 삶이 아니냐고 굳이 온갖 타인에게 강제로 자랑스럽게 표현(충고)할 적에도, 그는 이미 지각한 대상을 자기 기억에 편입한 후 이를 다시 소환하여 판단하는 과정(종종 이 과정이 원활하지 못하여 그 결과인 감상이 심리적으로 과대평가되는 증상은 흔히 발견된다)에서 감상을 느낀 것일 터다. 소환한 회상(의식)의 내부 연쇄 고리가 트라우마나 결핍에 의해 막히면, 그렇게 회상된 특정 이미지에 과잉 고착되면, 그는 하나의 이미지가 세계 전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의 순간적인 의식(회상) 전부가 결핍(트라우마)에 의해 내부 의미상의 순환이 막혀 고립된 관념의 자리로 매몰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느낀 게 그저 지각된 결과가 아닌 지각 그 자체라고 주장하는 등의 지각에 대한 과대평가와 그와 동반하는 과잉된 감동은 예의 매몰(고착)의 가장 커다란 증거다.
따라서, 실상 이에 대한 그 어떤 분석도 결국 저기 저 고립된 회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터다. 허나, 문제는 고립된 결핍에 도달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어쨌거나 고립된 결핍을 다시 같은 방식으로 외치는 건 그저 고립의 동어반복, 그러니까 증상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이에 도달하면서 이 결핍을 다시 표현하는 단서를 그 자신에게 제시하는 과정이겠다. 이 고립 지점에 다시 도달하면서, 해당 고착되었던 이미지 외에 달리 이 고립된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을 노려야 비로소 고립이 풀리고 순환이 가능해질 테니까. 막혀 고착된 의미상의 순환이 다른 해석의 여지를 통해 다시 작동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고착되어 과대평가되었던 이 결핍(트라우마)에 동반하는 과잉된 감정이 비로소 옅어지곤 하는데, 이 고립된 증상으로서의 감정은 종종 당사자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어떤 과대평가된 감동일 적도 적지 않을 수 있다. 결핍의 증상으로서의 감동을 보존한 채 다른 증상만 해결하는 게 요원한 일이기도 하고, 과잉된 감동을 일종의 '선민의식'에 연결하여 '세상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는 자의적 우월성을 자의식과 자존감의 근거로 삼는 이에게는 특히 이러한 결핍의 해결 자체가 '존재감'의 탈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게, 종종 발견하게 되는, 치료가 완성에 다가갈수록 치료 자체에 대한 불안이나 거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원하는 증상만 가지고서 나머지 증상만 치료되는 불가능한 결론을 위하여, 그는 원하는 증상에 특별한 위상(도착)을 부여하기도 할 터다. 불변하는 게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불변하기를 바라는 자기 자신의 본래적 실체로서 이 특별한 증상을 '존재'의 근본적 정의에 위치시키는 셈이다. 그리하여 그는 끝내 (성년 버전의) 존재(구강기 충동의 과업)론을 굳이 자생의 근거로서 만들어낼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
온갖 장소에서 우리가 접하는 저 결핍의 존재론적 선전들이 있다. 이들은 굳이 '차별성'과 '우월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경향성들을 특징 삼는다. 그렇게 '성공'을 위한 '노력'의 과대평가나 자의적 자존감의 고양에 혈안이 되어 있는 문구들을 살피자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지 않나. '어떻게 살겠다'라는 목표의식조차 실상 그 삶으로부터 부여받는 요소 중 하나일 따름인데. 이를 위해 거꾸로 삶 전체를 소모해버리겠다는 배 보다 큰 배꼽의 의지는, 실상 오랫동안 선전되어 온 '우월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비용으로 삶을 모조리 비용처리해버리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니까. 소위 '성공'이나 '행복', '자존감' 등에 '굳이' 온 삶을 매몰시키고자 하는 결핍은, 우열을 축으로, 그러니까 저들이 '선민'이거나 내가 '선민'이거나 양자택일의 우월감(삼킬 것-동일시/내사)과 열등감(뱉을 것-투사)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는 흑백의 시야(구강기)를 되감아 도래하게 한다. 무시 당하기 싫어서 무시 하는 자리로 오르고자 하는 그는, 결국 무시 당하지도 무시 하지도 않는 자리(구강기 과업의 완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양 행동할 수밖에 없을는지.
그러나 삶은 우리의 가치판단과는 관련없이 그저 그 자체로 전개될 뿐이리라. 그 전개 사이에서 '굳이' 우열을 찾고자 애쓰고, 우월성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애쓰는 건 거꾸로 자기 존재를 확증해본 적이 없어 존재에 집착하는 경향성(자기 치료의 시도로서 본능적 되감기)에 지나지 않을 터다. 그러나 유년에 그리 확증했어야 했을 존재 자체도 해당 발달의 과정을 지나치면 어쨌거나 그저 사변에 지나지 않을 테니. 삶이 전개되며 존재 또한 전개될 뿐이고, 불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