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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드라마 ‘지옥 시즌2’ 리뷰

의도의 논리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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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1 가짜 해상도
- 2 짐작의 출처
- 3 추론을 추론하는 추론
- 4 스스로 경외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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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짜 해상도

한정된 카드 패는 유한한 경우의 수를 가져오고 논증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이므로, 속임수가 없다는 가정 하에는 얼마간 ‘의도’에의 파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추론의 영역에서 특정 숫자가 총 몇 장이 있고, 덕분에 현재 몇 장이 남았으며, 이를 다시 남은 총 카드 수로 나누었을 때 원하는 숫자가 다음번에 나올 확률이 몇인지까지는 알 수 있겠으나, 확률은 확률일 뿐. 승패가 무수히 반복되어야만 전체적인 경우의 수는 예측한 확률과 유사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인 승리를 위하여 패배를 얼마나 잘하는지까지도 중요해진다. 말하자면 상대 카드 패 점수의 높이를 추론함에 있어, 그리 상대의 감정과 표정, 확률 등을 통해 추론할 적에 있어, 그는 상대의 ‘패’라는 사실 여부를 확률상으로 추론하는 것이 목적이지, 상대의 의도나 기분 따위를 추론하는 게 목적일 수 없다. 만약 의도나 기분 따위를 추론해야 한다면, 그건 그저 상대 카드 패의 점수를 추론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카드 패를 쥐고 [승패]‘만’을 오직 논함에 있어, ‘의도’에의 파악은 다분히 ‘후’결 과제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여기 이 ‘자칭’ 승부사는 언젠가 어느 날 우선 ‘경우의 수’를 따졌던 적도 있을 것이다. 그리 몇 없는 [경우의 수]들이 카드 패들 사이를 횡단하다 보면, 소위 ‘의도’에의 해상도가 명료해진다 느낀 적도 있을 모양이다. 허나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경우의 수’를 지나 ‘의도’를 넘나들다, 그렇게 마침내 의도[만]을 넘나드는 순간부터 그는, 그가 제아무리 무수한 ‘의도’를 간파했다고 “상상” 속에서 자신하더라도, 기실 그 모든 ‘의도’들은 ‘경우의 수’를 경유해서야 추론되고 관철되는 까닭에, 그것은 이미 ‘추론’이 아닌 ‘상상’ 따위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일 텐데. 그는 이 편안한 ‘상상’을 언제부턴가 [결코] 멈출 수 없을 양이다. ‘추론’으로 빚어낸 확률은 결코 확신이 될 수 없으나, ‘상상’ 속에서 어림짐작한 ‘의도’는 자기 자신의 알량한 ‘직감’에 따른 ‘확신’을 가져오는 까닭에 어찌나 아늑한 해상도를 보증할는지. 그처럼, 메시지를 분석하기는커녕 이해할 자신도 없어 일단 덮어놓고는, 모르겠으니 우선 메신저를 비난하고 보는 이 기구한 열등감의 사도들이, 얼마나 시대를 걱정하고 분노하는 저 [카리스마]적인 확신으로, 또 어찌나 세상을 깨달은 양의 저 [어른스러운] 확신으로 자기 열등감을 안달복달 감추곤 하겠는지.

그리하여 그는, 여느 사상가의 연설 속에 있는 개별 단위 개념 간의 필연성을 추론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저기 저 사상가가 무얼 정당화하려는지 넘겨짚던 어느 날 상상 속에서 시대를 대표하며 [어른스럽게] 분노하거나 다 알겠다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렇게 고상하고자 하는 몽상 속에서 일방적인 우정과 일방적인 적의를 반복하면서 외로운 길을 [자랑스럽게] 걷는다고 스스로의 비극을 주장하는 비대하고 비통한 자아를 더 크게 허우적거릴 모양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으론 ‘경우의 수’는 있을지언정 ‘의도’ 따위는 한 치도 명료하게 자리할 수는 없을 텐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도’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당연함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예컨대 ‘자리에 앉아 글을 쓰려는 의도’를 가진 누군가 있다손 치자. 그는 구체적으로 무슨 글을 어떻게 쓰려 할까? 과연 그의 ‘의도’는 누군가의 방해가 없다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여기 이 백지 위에 ‘있는 그대로’ 관철될 수 있는가? 무슨 극적인 방해 따위가 없이도, 우리의 글은 (머릿속으로라도) 저술되고서야 비로소 그 내용과 문체를 명백히 드러낸다. 아직 가능성으로만 머무른 상태에서야 그 자신의 의도를 얼마나 완벽히 (과연 문장의 단어 하나까지) 미리 알 수 있겠는지.

도대체 여느 현실에서 과연 무슨 ‘대사’를 명백하고 명료하게 암기하듯 그렇게 준비한 상태에서 발설하겠는가? 어느 배우의 대본이든지 간에 그것이 일종의 리얼리티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마치 ‘의도’치 않게 나온 듯 발설되어야 하지 않던가. 여느 음모론이 그저 음모론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상이 그리 의도대로 굴러갈 만치 만만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스스로 획책했을 계획이 그리 정교할 만치 그들이 그다지 똑똑할 리 없었을 덕택 아니던가.

청소년기 어른들에 대한 반항이 끝끝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청소년기에 마주하는 세상의 불합리성에 대한 분노가 그저 치기에 불과한 까닭이 결코 아니라, 소위 ‘어른’놀이를 거듭 수행하는 자들의 자랑스러운 저 ‘체면’이야말로 다만 치기에 불과하다는 익숙함 때문일 뿐만 아니라, 소위 자칭 ‘어른’들이 그 불합리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었을 만큼조차의 능력을 조금도 가졌을 리 없던 까닭 아니던가. 그러니까, 소위 ‘어른’이라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그만한 주의력을 둘 필요가 없다 느낄 적이 그 시절 비로소 그토록 자주 도래하곤 하지 않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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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짐작의 출처

카드 패가 도는 상황에서 ‘플레이어’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승리’일 것이 분명하다. 그게 규칙이니까. 그렇게, 명실공히 한계가 정해진 카드놀이의 ‘경우의 수’는, 이제 그 경우의 수에 빠삭한 이들에겐 “심리전”으로까지 동작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어쨌건 누가 무슨 카드 패로 어떻게 승리할지는, 조작되지 않았다면 최우선적으로 확률에 달렸을 뿐이다. 카드 패 행간에서 추론할 수 있는 ‘의도’는 그래봐야 ‘승리’라는 모두에게 확정된 의도 하위의 몇몇 구간뿐이다. 카드 패 밖은 어떤가? 우리가 뭔가 명료하게 의도하기엔 바깥은 너무나 의외성으로 가득 차 있지 않나. 또한, 자기 자신의 의도조차 미리 알기엔 우리 자신 또한 너무나 의외성으로 가득 차 있지 않던가 말이다. 우리는 맛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던, 먹으려고 한 적이 없었던 여느 아이스크림을 어느 날 맛본 후에 좋아하게 되곤 할 양인데. 그리 경멸했던 무엇이 어느 날 친근해지고, 애정했던 무엇이 언젠가 흉물스러워지곤 하던 게 얼마나 자주이던가.

일견 우리 빛바랜 본질주의자들의 낡은 시계공 세계관에서 끝내 측정될 수 없던 것은 측정하는 (스스로 [주체]라 의기양양 주장하고 싶어 하는) 당사자의 (측정 당한) 변화량이었을 텐데. 추측하는 기술 자체야말로 추측의 가장 커다란 변수가 아니던가. 이를테면, 주식의 미래 가격은 미래 가격을 추측하는 당장의 의견의 영향까지 반영한다고 하지 않던가. 관찰자(/주체) 또한 관찰 대상(/객체) 중 그저 하나인 것이다. 그러니까 요는, 예외는 예외가 없다는 사실이며, 혹 모두가 다 같이 예외라는 사실이고, 또는 모든 대상이 실은 주체라는, 나아가 주체까지도 다만 대상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리 추측하는 자 또한 그저 추측 대상 중 하나이며, 모조리 주체던 모조리 대상이던, 어차피 주체나 대상이나 그저 문법상의 파생물에 불과하지 않던가 하는 사실이다. 그리 추측하는 행위가 이미 추측의 대상을 변화시키고야 마는 필연처럼.

그렇게 보면 카드놀이만큼은 꽤나 명료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서로가 들고 있는 패는, 그리고 그 패를 점수로 환원하는 계산 방식은 결코 변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변수가 확정되면 안정적으로 ‘의도’를, 그 자랑스런 [본질]을 놀이 규칙에 의탁해서 겨우겨우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카드놀이에서나 그 상황적 임시 [본질]과 ‘의도’ 따위를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기실 무한 가능태의 세계에서 [경우의 수]를 무시하고 때마다의 [본질]이나 ‘의도’만을 짐작하고자 하는 것은, ‘추론’이 되지 못하고 그저 ‘상상’으로 탈락할 뿐이다. 그럼에도 여기 이 카드놀이에서의 ‘추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카드놀이에서 추론의 기반은 ‘나라면 어떤 상황에서 저렇게 행동했을 것인가?’라는 문제적 명제를 통해, 상대 행동이 최대 이윤을 위한 행동이라고 그 의도(목적)를 고정하고 역으로 경우의 수를 간추리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까 예의 명제는 ‘[나]라면’으로 시작한다. 혹자의 ‘의도’를 어림할 적에 우리는 저와 같이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감정적으로 어림할 수 있는 의도는, 그래봐야 우리 자신이 [이미] 언젠가 어느 날 느꼈던 감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희미하게라도 예의 의도를 가져본 적이 없다면, 그러니까 저와 같은 가치를 이윤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면 어림할 수도 없는 것이다. 허나 카드놀이는 다르다. 명명백백하게 놀이에서는 승리를 위한다는 목적(의도)이 규칙과 아울러 조작되어 있다. 서로 간의 한정된 [경우의 수]로 단위 [의도]를 간파하는 여기서의 작업은, 저 놀이판 바깥에선 무한히 늘어질 터다. 기실 카드놀이 바깥에서 우리가 혹자의 ‘의도’를 추론하기 위해선, 아주 우선적으로 추론 대상의 ‘가치관’을 가늠해야 할 양이다. 그에게 ‘칭찬’인 것이 나에겐 ‘비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가치관을 마주할 수도 있다(이것이 의도에의 지레짐작이 그리도 쉬이, 치밀한 필연성이 아닌, 얼빠지고 뭉뚱그려진 도덕으로 귀결되곤 하는 이유 아니겠나).


여기 이 의외성 짙은 미묘한 가치관들은 삶의 행간마다 녹아있다. 때마다의 해설서도 [당연히] 없다. 지나치고 나서도 그 판단(지레짐작)이 맞았는지 검산할 도리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간 타인의 삶을 토대로 그 의도를 지레짐작하면서도, [이미], 그러니까 [벌써] 살아가고 있다. 지나치면서도 자동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던, 혹 언젠가 어느 정도는 의식적이었던 이 얼마간의 ‘동일시’는 판단기준이라는 허상을 누구에게든 주입해 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를 사후적으로만 인지한다. ‘판단’할지 하지 않을지 ‘판단’하기 전에 이미 ‘판단’하며 살아간다. 말하자면, 누군가를 ‘판단’을 하지 않으며 살겠다는 [허언]은, 그저 이미 이루어진 머릿속 ‘판단’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매번 깨어질) 약속에 불과하다(미디어의 평판이 말하길, 판단하는 행위가 그토록 비난거리라서 곧이곧대로 판단을 억압하고자 하는 비현실적이고 병리적인 시도는 다만 사상 검열 따위나 낳을 뿐이다). 계획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여전한 ‘필연’일 텐데. 이미 다른 가치관에선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입해 그 ‘의도’에의 판단을 마치곤 한다. 소위 역량은 스스로 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얼마나 자체적으로 세뇌할 수 있느냐 혹은 거꾸로 얼마나 빠르게 판단하느냐 따위가 아니라, 예의 ‘의도’에의 판단으로부터 ‘경우의 수’에의 판단을 얼마나 잘 분리하여 사고해 낼 수 있느냐에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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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추론을 추론하는 추론


기호에서 감정을 분리해야 비로소 이들을 다룰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의자’라는 낱말이 실제 사물을 ‘지칭’할지언정 바로 그 사물이 ‘될’ 순 없듯. 사물과 그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를 [혼동]하는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의자’라는 낱말과 이 낱말이 지칭하는 사물이 똑같이 생겼다는 등으로 [혼동]하는 게 아니라면, 감정을 지칭하는 기호와 감정 자체를 구분해야 예의 기호를 통해 사물이건 감정이건 다룰 수도 있을 양인데. 마찬가지로, 사람의 경향성과 그 사람이 저지른 행동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의도’를 넘겨짚어 퉁 치는 건 [영원히] [지레짐작]인 [혼동]일 뿐이다. 우리에겐 그저 경우의 수만 있다. 가령 지레짐작을 완전히 하지 않을 순 없다지만, 확신 속에 거하지 않을 수는 있을 테니. 누가 봐도 그러한 의도에의 짐작이 맞다고 자신하는 경우도 있을 순 있겠으나, 그러한 짐작과 경우의 수를 추리하는 사고 과정을 분리할 노력 또한 수행될 수 있고, 또 거기 얼마간의 성취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의 ‘의도’에의 어림을 멈출 수 없는 경우, 그러니까 추론이 아닌 상상만으로 세계를 보려는 ‘편리’에의 고착이 악화될 경우 우리는 그리도 쉽사리 ‘동일시’하게 되지 않겠나. ‘의도’를 가늠하는 건 ‘동일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라면?’ 하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 편안한 상상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동일시의 다른 말은 ‘의인화’ 아니던가. 의인화는 그만치 낯선 세계를 친숙하게 조작한다. 필연성을 삭제하고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저기 저 목각인형이 지껄이고, 강철 문짝이 헤벌쭉 웃고, 지붕 위 굴뚝이 길길이 날뛰고, 야생의 짐승들과 논쟁하며, 그러다 언젠가 어느 날 자기 운명과, 그러니까 ‘신’과 대화를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가 실상으론 자기 상상과, 그러니까 ‘무의식’과, 다시 말해 ‘증상’과 대화를 하건 하지 않건 어쨌거나 그는 그 자신의 의도 또한 넘겨짚기에 이르지 않겠나. 무려 ‘숭고하고’ ‘무해하며’ ‘선량한’, 그러한 (넘겨짚은) 그 자신의 의도(허울)는 어째서 그토록 ‘굳이’ 비극을 앞다투어 맞이하는가?

사물들의 의도를 ‘무려’ 간파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의도’를 간파했다 믿는 자신이 스스로 너무나 성숙해 세상에 묻혀 조용히 산다고 믿는 여기 이 자칭 ‘은자’에겐 어떤 의도들[만]이 보이겠는가? 그저 세속적인 의도들이, 그러니까 그 자신이 언젠가 가졌던 의도들‘만’이 보일 뿐이다. 그에겐 명실상부하게 너무도 명백하게 해석되는 까닭에 여타 다른 가능성을 추리할 수 없는 바로 그 ‘의도’들은, 그리 그 자신이 혐오해서 벗어나고자 했던 저기 저 세속적인 ‘의도’들은, 바로 그 자신의 언젠가의 모습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무려 ‘세상에 묻혀 조용히’ 사는 바람에 그 자신의 ‘의견’을 검증할 기회는커녕, 다른 경우의 수도 들여다볼 시간이 없으니. 심지어 그 자신이 비인간적이라고 현명하고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비난하곤 하는 [비판]이라는 재판대에 설 용기도 없는 그는, 다양한 경우의 수(추론)가 아닌 그저 동어반복으로 이루어진 ‘상상’ 속에서 [문득] [깨닫는 것]이다. 그가 타인의 의도를 간파했다고 [자의적]으로 믿으며 [우월감]을 만끽(단정)하는 딱 그만치 타인이 그의 의도를 단정하면 [모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주체이기[만] 해야 하니까. 관찰자여야[만] 하니까. 그만치 그는 관찰 대상이 되면 모욕적일 양이므로. 그러나 그가 주체라면 그저 헛된 상상 따위의 주체일 뿐 추론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추론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추론까지도, 나아가 자기 자신 자체까지도 추론의 대상 삼아야 하겠으므로, 그 자신이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라는 걸 발견할 수밖에야 없을 테니. 그는 그런 모욕을 견딜 수 없는 까닭에, 주체와 대상이라는 문법적 개념은 ([현실]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바로 저 [상상] 속 우월감을 위해 [영원히] 극복되지 않고 고착되고 악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우열의 구분은 [그저 비교]에서 오는 게 아니라, [동일시된 대상에 대한 비교]에서[만] 오는 것일 텐데. [나와 같은 이]를 내가 [정신 속에서] (단순히) [이겼다]는 [쾌감]은 하나의 족쇄가 되어 영영 [나와 같은 이]를 찾게 하고, 그리하여 그 자신이 타인에 관해 지레짐작한 의도가 분명하리라는 [자의적] 사상누각의 상상은 영영 그 도피를 이어가며 악화된다. 그가 [나와 같은 이]로 여기는 건, 기실 [나와 같은 이]가 전혀 아닌, [나와 같은 자(숙적/경쟁자)였다면 좋겠는 그런 이]일 텐데. 그리하여 이런 양상의 [동일시]는, [동일시]하고자 하는 이들을 골라낸 [선별]의 결과인 까닭에, 그저 무관심이 아닌 경쟁심, 그러니까 [열등감]이야말로 예의 [동일시]가 작동하는 기반이라는 증거가 될 양이다. 여기 이 세상을 [자랑스럽게] 개탄하는 초월적 은자의 우월감은 그저 그만큼의 [열등감]만을 우렁차게 보여주겠으므로.

실은 ‘의도’를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그따위의 신화적 만능 해결(/도피) 열(/자물)쇠는 없으며, 그저 살아가는 삶의 무수한 때마다의 판단과 시행착오가 그 추론 안에 있을 뿐이겠으므로. 그러니까, 그저 때마다의 [경우의 수]가 [역량]을 구성하고 있을 뿐이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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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스로 경외하려는

누군가 그의 의도를 단정(/간파)하면 그는 어째서 모욕감을 느끼는가? 도리어 그 자신이야말로 타인의 의도를 단정하는 데서 자기 자신의 [통찰력]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찬양되고자 하는 증명 불가한 능력에의 [우월감]을 [자의적으로] 만끽하곤 하던 까닭 아니하던가. 따라서 그리 모욕(/열등)감을 느끼던 그가 그 자신의 열등(/모욕)감에서 벗어나려면, 그러니까 스스로 [본의 아니게] 정확히 바라봐버린 자신의 내적 ‘본체’를 부정하려면 타인의 강렬하지만 (반드시) [부정확]한 판단이 그 자신에 대한 자신의 판단(열등감)을 초과해 주장되어야만 하지 않겠나. 이 자칭 (일견 증명 불가능한 마음이나 감각에 대해서만 ‘굳이’ 그토록 쉬이 주장되곤 하는) [통찰력] 있는 교주는 (스스로는 원치 않았다 호소하는) 타인의 경외를 통해서야 비대한 자아와 빈약한 정신의 허기를 겨우 채울 수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늘상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스스로 암시를 재차 거는 모양이다. 그는 인기를 통해 스스로 속이고자, 그처럼 스스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보다 스스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더욱 집중하여, 아울러 바로 그 열정적인 자기 모습에 한껏 고착되고 취해 도피하고자, 재차 그 평판에[만] [우선] 의지하고자 (호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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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짧고 강렬하면서도, 이렇게 딱딱 들으면 굉장히 훌륭한 말 같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가? 조금 알아먹기 힘든, 그런 거 있잖아요.
모르세요?
네, 말이라는 게 원래 좀 이렇게 아리까리하고 어사무사하고, 그러면서도 정말 어디다 갖다 붙여 놔도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말들이 정말로 오래 살아남아요.
절대 이해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이해되는 말들, 분석 당하게 돼요.
그리고 분석 당하기 시작하면 경외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아시겠어요?

넷플릭스 / 지옥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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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그가 단정되지 않기 위해 어떤 열등감을 무슨 기제로 진행하는지 [명백히] [늘] 단정하곤 할 수 있지 않겠나. 우리는 우리네 분석 당하지 않으려는 경향성을 특히 더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간파당하지 않으려는 양태]는 누구나 언젠가의 자기 [응석]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만치 그토록 전형적이고 획일적인, 그리하여 그 무엇보다 누구나 [간파 가능한] 그런 [단촐]하고 [촐싹]대는 내용을 가진 도돌이표의 경향성인 까닭일 텐데(그저 여기서의 몇 없는 함정은, 한 명의 개인이 [설마] 그렇게까지 돌이켜 불안정할까?하는 바로 그 [설마] 때문에, [우선] 보이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추론하곤 하는 경우일 양인바. 여러모로 이 [당연하고도 상식적이라 여기던 동일시]에서조차 벗어난 [필연]으로 예의 불안정(상상)을 [추론]하여 [반드시] 예의 [설마]부터 [우선] [단정(/간파)]하고서야 다듬어 나갈 필요가 있으리라).

이와 같은 양상의 불안정은, 그처럼 누구나 익히 알듯, 한 걸음의 분석에서부터 모든 것을 하나씩 꾸준하고 치밀한 [인과]로 재차 다시 출발하고 전개하는 방식으로 그리 험난하게 ‘노력’하기가 싫어, 동일시 기제(투사와 내사라는 [은유])로 모든 것(가령 열등감)을 해결한 척하며 설명하여 관심을 좀 끌어 보려는 섣부른 퇴보(도돌이표)의 ‘효과’, 그러니까 이조차도 ‘의도’가 아닌 그저 ‘증상’일 양이다. 가령, 그처럼 소위 부끄러운 사실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자랑스럽게 바뀔 리 없으니. 어른스러운 표정이 알량한 내용을 어른스럽게 바꿔주지도 못할뿐더러, ‘어른스러운’이라는 이 낡고 알량한 포장지의 매듭 방식도 그 자신이 타인에게 자기 자신에 관한 어떤 허상을, 어떤 비대한 자아를, 그러니까 어떤 ‘단정’을 자기 이미지로 유발하여 못 박고자 얼마나 안달복달 호소하는지만 더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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