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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영화 ‘베놈 라스트 댄스’ 리뷰

빌런의 논리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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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성은 억압되었는가?
2 카타르시스
3 인기와 동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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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은 억압되었는가?

굳이 ‘미셸 푸코’의 저작 “성의 역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수한 반복에 처해 있다. 어째서 세대가 바뀔 때마다 소위 ‘성sex’에 관한 담론은 그토록 획일적으로 ‘억압’을 고발하곤 하는가 하는(마치 새 시대의 신선한 화제인 듯 굴면서).

혹자가 자기 앎을 타인에게 설명할 적에는, 얼마간의 ‘설득’에의 태도 또한 동반한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진 못하더라도, 무슨 말인지는 최소한 납득하게는 해야 한다는 통념상의 의무를 소위 ‘설명’이라는 행위가 가진다손 친다면, 여기 이 설명은 어느 정도 ‘체험’을 전제한다 할 수 있으리라.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이에게 애써 바다를 설명해 본들, 청자는 머릿속으로밖에 바다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그저 논자의 설명을 토대로 바다를 구현해 볼 뿐이니. 그리고 그러한 설명을 위해서 우리의 논자는 그저 논술할 뿐 아니라 저를 감각적으로 묘사하기도 해야 한다. 그는 청자에게 얼마간의 ‘체득’을 구현해야 하므로.

이차 성징 이전의 아이에게 성sex을 설명해야 하는 성인의 상황이 그와 같다. 그가 아이에게 예의 성을 설명하고자 마음먹는 순간, 그는 이를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묘사가 극에 달해야, 나아가 그에 관한 청자의 호기심 또한 맞물려 신나게 타올라야 얼마간의 ‘유효한 설명’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자는 그리 묘사된 도달 지점에 마침내 다다를 수야 없는 것이다. 그는 그저 설명받는 대로 머릿속에 대상을 구현할 뿐이지, 그 설명을 체득할 순 없는 것이므로. 의자에의 설명으로 논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 의자인지 알기 위해선, 미리 청자가 의자가 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이차 성징 이전의 아이는 성sex을 체득할 수 없다. 따라서 아이에게 그것은 ‘억압’된 것으로 남는다. 그러니까, 논술되고 묘사되는 이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왜 아니겠는가? 그 어떤 난봉꾼도, 기능을 소유하기 전에 체험해 볼 수야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비밀’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비밀’은 마치 그에게 억압의 방식을 고수하는 듯 보인다. 제아무리 그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미지와 영상을 찾아 나서더라도 이차 성징 이전의 개체는 이 내용을 결코 ‘체득’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는 영영 알 수 없는 점근선에 도달하고자 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그는 하염없이 그에 도달하고자 하면서도 끝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은연중에 그 자신의 도달을 ‘사회’나 ‘어른’들이 가로막고 있다 여기지 않겠는가? 그는 마침내 그것이 억압되었다 여기지 않겠나?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를 가로막고 있는 건 문화나 사회가 아니라 그저 생물학적 한계 논리일 뿐이다.

그리하여 무수한 금지가 그러하듯, 소위 도착증이 아닌 이상에야 억압이 풀린 허용 위에서 그가 도달하는 장소는 억압되었던 시절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친 어딘가일 텐데. 성인이 되어 허용되는 것은 술이나 담배와 같이 억압되었던 무수한 무엇들일 수도 있겠으나, 억압 자체의 완연한 해소는 아닐 모양이니. 비로소 해소되는 게 억압이 그에게 가져왔던 기대 자체는 아닌 것이다. 물론, 말하자면 그는 흡연도 음주도 가능하기는 할 테지만. 이를 통해 도달하는 쾌락은, 금지되었기에 가졌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어딘가일 뿐이다. 그가 그 시절 스스로 얼마간 부당하다 믿던 억울한 만큼의 쾌락이 아닌 것이다. 이 비대칭의 찌꺼기들은 더 큰 해소를 외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지금 입에 물린 담배가 아닌 ‘진정한 담배’를 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목을 적시는 술이 아닌 ‘진정한 술’을 원하는 것이다. 그처럼 어쩌면 그저 허용된 권리를 넘어선 위반적 권리, 그중에서도 ‘진정한 위반’만을 원할는지. 그러니까, 끝끝내 그는 도달하지 못할, 그러나 여태 기대해 왔던, 그러므로 [지금 그가 누리는 자유]가 아닌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이 [진정한 해방]은 최소한 그의 해소되지 못한 ‘억울함’을, 아주 오래 묵힌 [욕구불만]을, 마침내, 거꾸로 증거한다.

다시, 그리하여 성은 억압되었는가? 과연 이차 성징 이전 억압되었던 성이 그리 [욕구불만]이 되어 돌아온 것인가? 그러나 이차 성징 이전에 억압되었던 것이 과연 생물학적인 ‘성’이 맞긴 한가? 그럴 수 있나? 그렇지 않다면 이 욕구불만은 ‘성’을 지목하는 게 아니라 ‘억압’만을 지목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물학적 한계로 인해 개체는 이차 성징 이전의 상태를 필히 거치며, 이 과정에서 ‘억압된 것’으로만 ‘성sex’을 우선 접할 수밖에 없겠으니. 고로 설명하기 부끄러워 ‘비밀’인 게 아니라, 청자에게 체험적으로 결코 설명될 수 없어서 ‘비밀’인 셈이며, 또 그것이 ‘비밀’인 까닭에 언젠가 어느 날 부끄러운 것이 된 모양이니.

그리하여 종종 우리는 더욱 자유를 외친다. 쉬고 있지만 [더욱 격렬하게] 쉬고 싶다거나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양. 우리는 해방을 그런 식으로 외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처럼, 때마다의 [더한] 위반(해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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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타르시스

우린 종종 카타르시스를 마주한다. 오래 고대하던 무엇을 이루며 감지할 수도 있고, 타인을 통한 대리만족으로 이를 감지할 수도 있겠다. 소설이나 사건이 카타르시스를 가져오는 것은, 그것이 직접 겪은 사건에 의해서건 이입을 통한 동일시에 의해서건 간에, 비로소 이를 통해 억압에서 해방되곤 하는 까닭 아니던가.

가령 혹자가 오랜 학대 속에서 그저 벗어나는 정도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한다면, 한편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다른 이가 적극적으로 이를 고발하고 그 피의자에게 값을 치르게 강제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서야 그가 카타르시스를 감지한다면, 어째서 그는 스스로 벗어난 바에 대해선 그다지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인가? 말하자면 여기서 그가 대리 해소한 억압은 ‘억울함’이 아니라 ‘공격성’인 까닭일 양이다. 이를테면 그는 내심 복수하고 싶지만, 그의 세계관에서 복수는 감히 꿈꾸어선 안 되는 부정적인 감정이라 스스로 그런 감정(원한)이 없다고 영영 억압(자기암시)해 왔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므로 [억압]을 일으킨 현실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과 이를 심리적으로 [해소]하는 건 얼마간 다른 문제일 텐데. 도리어 무엇을 통해 그것이 해소되는지, 그러니까 그가 과연 어디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를 통해 그가 무엇을 어떤 식으로 [억압]해 온 건지 거꾸로 추론할 수도 있으리라. 과연 우리가 억압하고 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토록 쉬이 부정하는 감정은 무엇인가? 하고. 그리 스스로 추론할 수도 있으리라.

살다 보면 ‘누구나’ ‘당연히’ ‘자연스럽게’ 다른 이를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무수한 미디어에서 ‘유년의 동일시’를 위해 안배된 ‘뻔한 주인공’들은 이 미움에 반드시 이유를 매달아야 한다는 식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그들에 따르면 미움에는 미워할 만한 ‘정의롭고도’ ‘정당한’ 이유가 [꼭]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의 ‘자아상’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 유년기(를 포함한 삶 전체)는 너무도 ‘당연히’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이를 미워할 수 있는 까닭에, 그런 경우 이미 미워하고 나서야 이유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성sex’이 비밀이기 때문에 그제야 비로소 부끄러운 대상이 되듯. 그리하여 그게 누구든 억압의 시초에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일방적 도덕률이 단순한 ‘명령’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음을 소급 추론할 수 있지 않겠나.

이 명령은 만화 주인공의 동일시로부터 올 수도 있고, 부모의 맹목적 압력으로부터 올 수도 있을 터다. 또 그 모든 파편이 짜깁기 된 자아상(거울상)이 늘 원인일 양이라. 그리하여 그러한 억압이 근본적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아와 상관없는 (비현실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될 터다. 그러니까 마치 ‘전혀 화를 내지 않는’, 혹은 ‘완벽히 온화한’, 또는 ‘빈틈없이 어른스러운’, 나아가 ‘항상 침착한’ 성격 등의 괴랄한 이상을 구현하며 심화된 [억압] 덕택에 언젠가 어느 시점에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할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스스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보다는, 과연 그가 (자기도 모르게라도) 무엇을 비웃고 어디서 카타르시스를 찾으며 마침내 누구와 경쟁하여 [열등감]을 느끼는지를 통해 그가 어떤 식으로 동일시하여 어디 해소를 하며 그 반대급부로 도대체 무슨 억압이 작동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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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기와 동일시


소위 영웅신화에서 ‘전형적인’ 주인공은 한없이 공명정대하지만 빌런은 좀 다르다. 물론 어떤 독자들은 뻔한 가치관을 지녔으며 끝내 승리하는 [주인공]을 위협하는 사연 있는 [빌런]에 매력을 느끼기도 할 테다. 그리고 이 사연이 예의 빌런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예컨대 주인공은 사회가 요구하고 인류가 기반한 기본적이고도 존엄한 뿌리 가치라고 주장된 바로 그 [주장의 관성]을 소박한 고민도 없이 태어날 때부터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얼빠진 평면성을 지닐 수 있고, 또 그래서 독자는 얼마간의 익숙한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여기서 빌런은 멋진 양념이 될 수 있다.


신화 속 빌런의 사연은 주인공의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고방식에 딜레마를 이어 추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주인공에 ‘우선’ 이입한다. 주인공은 끝끝내 그 어떤 비난 받을 만한 수단도 과정도 없이, 오직 떳떳한 수단과 과정을 통해서만 온갖 운을 경유해 승리에 도달해야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여기 이 ‘전형적인’ 주인공은 독자가 받은 초기(유년) 명령어의 집합과 쉬이 동일시될 수 있어야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빌런은 좀 다르다. 그는 사건을 일으키며 혼란을 만들기도 하고 통념상의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으므로. 누군가를 속이고 뭔가 훔칠 수도 있어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신화가 인기를 유지하려면 끝끝내 빌런은 주인공과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데 이르던가, 주인공에게 패배하던가 하기는 해야 한다. 만약 악독하고 교활한 빌런이 통속적이고도 평면적이며 지루하고도 ‘뻔한’ 가치관으로 교화되기는커녕 ‘감히’ 그 ‘파격적인’ 상태 그대로 완전히 승리해 버린다면, 빌런이나 주인공의 인기가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서사를 가진 신화가 독자들에게 인기를 잃을 수 있다. 익히 (스스로의 가치관을 맹종하는) 부모들은 (특히)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미칠 예의 서사의 영향을 걱정할 수도 있다. 가령 절대로 옳아야 할 본인들의 가치관에 대한 의심을 혹자(아이들)에게 불러일으킬까 불안하여, ‘굳이’ 확인될 수 없는 온갖 추상적인 명분(인성, 마음 등)들을 헐레벌떡 찾아와, 귀에 걸며 귀걸이라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단언하거나 코에 걸며 코걸이라 ‘세대와 시대를 걱정하는 신중한 표정’으로 호소하는 ‘연극’적 아전인수를 ‘어서 빨리’ 실천하는 ‘뻔하고’ 코믹한 ‘주인공’들이 ‘현실’에서‘도’ 그토록 자주 곪아 목격되지 않던가.


물론 소꿉놀이 등의 역할극에서 아이들이 자꾸 주인공을 맡으려고 하는 양상은 저리 흔하겠으나, 그에 맞춰 매력적인 빌런의 인기 또한 나쁘지 않을 모양이다. 그의 행동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의 ‘위반’이 어떤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텐데. 곧, 예의 빌런은 억압된 행동을 저질러 버리는 대리만족을 끼칠 양이므로. 가령, 해서는 안 될 나쁜 말을 직접 하진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대사들을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행하는 까닭일 수도 있다. 이 빌런이 주인공만 아니라면, 아이들의 평면적이고 고민 없이 단순하며 정의로워 뻔하디 ‘뻔한’ 세계관은 일단 무너지지 않는다 믿어질 수 있다. 어쩌면 다분히 허용된 저기 저 ‘뻔한’ 세계관을 ‘굳이’ 유지하면서 적절한 일탈도 쏠쏠히 즐기는 것이다.


아이들은 언젠가 예의 주인공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다. 어느 날 그들이 동일시하는 주인공은 유명한 위인이거나 뛰어난 스포츠 선수일 수도 있다. 혹 존경하는 스승일 수도 있다. 한 분야에서 모두의 숭배(동일시)를 받으면, 마치 그가 분야를 초월한 모든 면에서 본보기인 삶을 사는 양 연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리 모인 관객은 사소한 도덕적 흠결에도 돌아설 수 있다. 애착(/선망)은 그리도 쉬이 그 이상의 증오(/열등감에 의한 질시)로 바뀌곤 한다. 그리 보면 혹자는 스스로 동일시 하려는 대상이 (완전한) ‘주인공’이 아닌 것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나보다. 심지어 이 주인공이라는 이미지 또한 만들어지고 주입된 괴랄한 ‘자아상’인 점까지도 예의 아이러니에 포함되지 않던가. 마치 모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적용되어야 할 뻔하디 ‘뻔한’ ‘절대 도덕’이 있고 그걸 자신만 ‘완벽히’ 아는 누군가가 자리할 수 있다는 듯. 전인격적으로 위대한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듯. 사람이라는 명사 앞에 ‘존경할 만한’이라는 형용사가 올 수 있다는 듯. 그러한 등등의 자랑스러운 탁상공론의 낡고 고루하며 종종 병리적이리만치 ‘뻔한’ 주인공이 어찌나 다양하게 상상되고 선망되고 욕망되고 동일시되는지.


그런 덕택에, 어쩌면 언젠가 우리는 주인공보다 조연의 삶에 더 눈이 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으로 보이는 까닭일 수도 있고, 거기서 예의 카타르시스를 감지하는 까닭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 덕에 어떤 개인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도 있을 양이다. 가령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사회나 삶이 부당하게 제시한 명령 때문에 억압했던 나의 감정은 *였다고. *을 억압당했다고. 예의 빌런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러니까 빌런의 어떤 행동에서 내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그리하여 곧장 해방의 담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마치 ‘성은 (왜) 억압되었는가?’를 외치며 고발하고 항의하던 언젠가 어느 날처럼. 억압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있는 그대로 존중받았어야 한다고. (엉엉) 주장하는.


그리하여 예의 해방에의 주장이 예의 억압이 애초부터 없었어야 한다고까지 나아간다면, 그리고 (그럴 순 없겠지만) 그와 같이 어떤 억압도 없다 가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떤 감정도 다룰 수 없게 되지 않겠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자기 감정을 어디까지는 존중하고 어디까지는 억압해야 한다. 어느 정도는 무시하고 어느 정도는 달래고 얼마간은 다른 일을 하는 동력으로 치환(승화)하기도 해야 하니까. 우리가 우리 내면을 알아차리고자 하는 건 이를 어디까지나 스스로 다루기 위해서겠으므로. 따라서, 이를테면 과연 어느 정도의 억압이 (사회)문제(/병리)가 되는지에 관한 논의는 필히 억압 자체가 자기 내면을 다루는 훈련의 일부라는 걸 전제한 논의일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


우리 최초의 걸음마가 무수한 시행착오 위에 있는 양, 자기 내면을 살펴 다루는 일 또한 마찬가지일 모양이니. 사람의 내면이라는 게 [특별히] 고귀하면 얼마나 고귀하고, [특별히] 신비로우면 또 얼마나 신비로울까마는. 그러므로, 저 동일시의 맹목적인 명령(이미지)어 따위와 상관없이, 어쨌거나, 억압을 할 수 있긴 해야 승화 또한 가능할 테니. 어떤 그릇에든 물을 일단 담아야 이를 옮기든 가공하든 할 수 있지 않겠나. 해방의 여부는, 무턱대고 (이미지에 동일시 하는 등으로) 배설하는 게 아니라, 이를 다루어 얼마나 더 많은 가능성들로 연결할 수 있는지에의 ‘역량’에 그 ‘개념’적 성패의 ‘정도’가 달려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물론 존경할 만한 인간이 있으리라는 이미지(환상) 또한 우리가 의지할 그저 ‘상상’된 위로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으나. 또 무턱대고 도덕이나 전인격적인 ‘이미지’ 따위에 동일시하고 찬양하며 이를 주인공 삼는 양태 또한 그저 의지할 그저 여러 ‘상상’된 위로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으나. 달리 더 나아가 어떤 감정을 얼마간 억압하고 얼마간 해갈(카타르시스)하면서 갖은 빌런과 주인공의 관계 양상을 ‘분석’할 뿐 아니라, 기실 끝내 과연 누가 주인공이고 빌런인지 상관없이, 그로부터 ‘추론’되는 내용을 삶에 그저 다시 ‘사용’하고자 하는 ‘역량’에 다다를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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