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기계는 자기가 유발하는 모순들, 자기가 초래하는 위기들, 자기가 낳는 불안들,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지독한 조작들을 먹고사는 습관이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깨달았고, 자기 의심을 멈췄으며, 한편 사회주의자들도 마모에 의한 자본주의의 자연사 가능성을 믿기를 포기했다. 그 누구도 모순으로 인해 죽은 적은 없다.
들뢰즈·과타리 / 안티 오이디푸스 _
이른바 달성에 실패할 수밖에 없던 초기 필연의 도안 덕택에 하염없이 거듭 번역되어 오던 예의 [성애]는, 어느 날엔가 가족애로, 또 형제애로, 혹 우정으로, 나아가 사랑으로, 간혹 질투로, 그리하여 미움으로, 심지어 증오로, 때론 혐오로 격렬하게 번지곤 하거니와. 저기 저 갖은 욕동들이 협업하여 자아낸 애증의 [자아상]이 마침내 [자기 인정의 자의적 이미지(존재론)]를 주파하고자 하던 날, 그(욕동)들이 처음으로 뛰어넘고자 욕망할 수 있을 과녁은 일단의 이미 알고 있던 무엇(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때마다 스스로 변주된, 고로 영영 이어 변주될 소위 오이디푸스의 무리는, 그리 매번 아버지 살해에 온전히 성공할 순 없을 모양이거니와. 비로소 그들이 딛고 설 수밖에 없던 시신의 주인은 끝내 언젠가의 자기 자신들 아니겠나. 언젠가 어느 날 자기 아버지가 되고자 하던, 그리하여 그로부터 인정받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를 뛰어넘고자 하던 그들은 처음부터 아비의 시신 아닌 그 자신의 종말(죄책감)과 마주할 운명이었나니.
저처럼 언젠가 멸구된 시체를 다른 단서를 기반으로 추리하며 재차 소환하여 들여다본 그들은, 비로소 아버지 아닌 예의 아버지를 닮고자 했던 자기 이미지의 시체를 들여다보며, 그와 같이 아버지를 뛰어넘고자 허망하게 욕망하던 예의 무수한 가능적 쳇바퀴(동어반복)를 그제야 마주할 양이었던 바. 그들의 생이 끝끝내 초과해야 할 과녁은 기실, 과녁을 막론하고 (비교우위의) 초과를 욕망하는 바로 그 욕망 쳇바퀴 자체에 다름 아니겠으므로.
온갖 방식으로 다시 시작되는 성인식(통과 의례/아버지 살해/공격성에의 인정)의 최후 과녁은 언제나 그들 자신(아버지상의 소유자/죄책감)이었으니. 그처럼 낯익은 굴레(쳇바퀴)는 유년(이미지/자아상)의 파괴 없인 결코 단 한 치도 매듭지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전적으로 파괴된 자의식 너머에서야 비로소 굴레 바깥의 경로가 [본의 아니게] [겨우] 출발할 수 있으리라.
물론, 가능성(설정)이 무작위로 늘어난 만큼 덧붙을 한계(조건)들은 자아상을 저 바깥 무작위의 무성한 확률로 이끌 수 있을지는 모르나, 늘어난 가능성에는 소위 [실패]에의 가능성 또한 포함될 수밖에 없을 셈이니. 무수한 경로들이 그리 많아진 경로 그대로 그들 자신에게 매번 다시 조건 지어지는 또 다른 한계를, 그러니까 갱신된 [책임]을, 따라서 [절대적 불가능성]을 [강제]하기도 하거니와. 곧 직접 뛰어넘고자 하던 시도의 무수한 재차 시작[들]과는 완전히 별개로, 시도 중에서조차 예의 불가능이라는 [실패]에의 감각에서는 도피하기 위하여 확증된 실패에의 시도 구간 코앞에서 이를 에둘러 지나가고자 재차로 거듭 시도되는 우회로들이 동일 선상에서 [종말]의 이름으로 끊어지는 여기 이 완연히 익숙할 반복이 과연 우연일는지.
그리 온갖 변주들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은 비로소 매번 다시 기필코 돌아오고야 마는 [유일한 양상]인 [통과 의례]로써의 [삶] 자체겠으니. 마침내 아버지를 뛰어넘을 오이디푸스는, 그리하여 영원할 청소년기를 지나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타인을 달성한 타인, 모성을 쟁취한 타인,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은 타인 중 하나가 [전혀] 아닌 다만 개별자로서의 개인, 특별함 따위 등의 거품 낀 그림자(이미지)를 굳이 좇지 않는 그저 자기 자신이기만 한 스스로를 그제야 [때마다] [영원히] [다시] 발견할 따름이리라. _
중요한 건, 부모의 삶과 사랑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욕망적 생산에서 부모의 위치와 부모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요, 거꾸로 욕망 기계들의 모든 작동을 오이디푸스의 제한된 코드로 복귀시키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