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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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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연
- 2 나쁜 예감
- 3 해몽
- 4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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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연
우리는 일단 생존한다. 그 후에야 희로애락이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예의 희로애락을 관조하기도 한다. 때때로 여느 상황을 예상하여 감정을 미리 느낄 적도 있다. 나아가, 종종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이입’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간혹, 그것을 원치 않았더라도, 본의 아니게 ‘이입’[되어] 버리곤 한다.
이 모든 감상들은, 그리하여 저 모든 내적 사건들은 당사자의 ‘생존’을 전제로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때론 ‘감상’이 ‘생존’을 개의치 않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원인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모른 척하기도 한다. 기실 감정의 층위 아래에 그 전제로써 ‘생존’이 자리하듯, 필연성이 누구에게나 심층에 자리하는 양상이 바로 그러하다. 어쩌면 혹자는 심연의 자리에 ‘감정’이 있으리라 가정하기도 하나, 심연이라는 필연성이 그와 같이 외적 상황에 일희일비하기란 쉽지 않을 양이다.
소위 ‘기계적인’ 이성과 ‘낭만적인’ 감정을 나누는 혹자의 근거가 도무지 어디에 있나? 그저 감정이 지목하는 거리가 있을 뿐이다. 예의 감정이 지목하는 게 당장의 ‘자극’이라면, 예의 이성이 지목하는 건 예의 감정의 양상이리라. 우리 감정이 어떻게 변하고 그래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는지, 곧 감정을 다루고 싶다는 ‘감정’, 저와 같이 높은 층위의 레이어에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소위 ‘이성’이 ‘감정’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인간이란 없다. 그저 ‘감정’을 더 멀리 보거나 곧장 발산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태에서 벗어난 아이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우선 아이는 ‘생존’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 감정을 눌러야 한다. 알게 모르게 처음부터 눌리는 감정의 이름 중엔 ‘전능감’도 있다. 가령 아이는 손짓 한 번에 세상이 휘몰아치길 바라지만, [당연히] 그럴 리 없다. 또한, [너무 당연하게도] 아이의 ‘생존’이 아이의 ‘전능감’보다 앞서 있다. 그런 까닭에 아이는 ‘현실’에 억압당하는 것이다. 아이의 ‘생존’ 욕구가 ‘전능감’에 대한 욕구보다 필연적으로 우선이라는 걸 아이도 알고 부모도 알고 누구나 다 아는 까닭에, 그것의 설명 방식이 생물학적이건 문화학적이건 상관없이, 아이는 ‘생존’ 욕구가 위협당하자마자, 아니, ‘생존’ 욕구가 아주 희미하게라도 위협당할 낌새라도 느낄라치면 우선 ‘전능감’에의 욕구부터 내려놓는다. 아이는 알고 있다. ‘생존’에 대한 욕구가 ‘전능감’보다 ‘심연’에 가깝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다. 진수성찬 앞에서 뭘 먹을지 고민할 때보다, 몇 날 며칠을 굶었을 때 그가 [더욱] 심연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다. 정신없이 쇼핑에 몰두할 때보다, 가난에 강제로 몰두 당할 때 더욱 짙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모태에서 갓 벗어난 아이는, 그리하여 ‘생존’이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생존에의 위협에 내몰린 무력한 어린 동물의 원한은, 그와 같이 이 세상에 출두한 모든 생명체의 최초 원한은 바로 이 ‘생존’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것에 속해 있다. 바로 이 ‘필연성’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것에 속해 있다. 고로, 그가 여태 그 자신도 모르는 원망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예의 포기를, 그러니까 예의 ‘필연성’을, 따라서 ‘현실’ 원칙을, 예컨대 무수한 ‘노력’[들]의 속성을 ‘미리’ 혐오하고자 늘상 저 원한의 태세에 온갖 정당화의 근거를 덕지덕지 발라 취하고 있지 않겠나. 저 받아들이지 못한 ‘외부’에, 그러니까 단위 ‘책임’에 그 어떤 부조리한 이름표를 달아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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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쁜 예감
허나 [아주 어린] 아이는 ‘생존’이라는 ‘심연’을 직접 직면하기가 쉽지 않다. 그에겐 ‘인큐베이터’가 필요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일단 그의 ‘전능감’이 충족되는 양 느끼는 상태에서 출발해 차차로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이 밀려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까지 그는 그 자신의 전능감을 세상 모두로부터 ‘존중’받아야 하나? 언젠가 그가 낳을 자녀로부터까지 그는 그 자신에의 오래된 유아적 ‘전능감’에의 예의 ‘존중’을 바라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기실, 무엇이 어쨌건 [유아는 극복될 운명이다].
가장 바깥에 있는 심연, 가장 안쪽에 있는 현실, 필연의 가면을 쓴 그것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다정다감한 ‘인큐베이터’에서 언젠가 어느 날 반드시 나와야 한다. 혹은 반드시 나오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한 늘상 모두가 ‘당연히’ 나오고자 하고 있지 않나. 그럼에도 누구도 그 자신이 이미 그 ‘인큐베이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신할 순 없으리라.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러므로 [누구나 ‘당연히’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바로 그러한 ‘조건부의 공감’을 위한 심리지대가, 그러니까 [인큐베이터([무]조건적 공감 지대)]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외부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무수한 중간 지대가 있지 아니하던가. 가령 ‘놀이’가 있고, ‘우화’가 있으며, ‘환각’이 있다. 이른바 여기서 환상의 유효성은 ‘현실(필연성)’과 ‘전능감(감상)’ 사이에서 얼마나 완충작용을 할 수 있느냐에 있지 않던가. 환상의 논리는, 그 면면을 이루는 단위가 ‘욕망’이라는 데 그 기본 원리가 있을 양이니. 그 필연성의 단위가 ‘욕망’이 아니고서야 그는 ‘굳이’ ‘왜’ 바로 그 구체적인 환상을 바로 ‘그때’ 꿈꾸겠는지. 꿈을 꾸도록 태어나서? 필연을 담보하지 못한 미사여구는 ‘당연히’ 설명조차 될 수 없다.
그 꿈이 소위 말하는 ‘야망’이건 흔하게들 겪는 ‘백일몽’이건 간에, 어쨌거나 꿈은 욕망으로 구성된다. 이를테면 그는 예의 꿈을 과연 어디서 복사해 왔나? 그는 ‘지금’ 누구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그가 짜깁기 한 욕망들은 과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해몽의 논리”는, 쉬이 말해 그의 일시(현재)적 욕망이 과연 어떤 ‘욕망’으로 짜깁기 되어 있는지 우선 살펴 가늠하는 작업일 터다. 그리하여 악몽을 꾼 이에게 쉽사리 물어볼 수도 있으리라. 만약 꿈속 등장인물 중 누가 가장 이입이 힘드냐고. 가장 불편하느냐고. 그에게 자신을 대입하면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꿈에서 그의 위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어떻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의 무의식이 예의 등장인물을 자기 꿈에 포함시켰겠느냐고. 자기 자신을 쉬이 대입할 수 ‘없는’ ‘등장인물’이야말로, 그러니까 감독이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이입’은 하기 싫은 캐릭터야말로 그 자신이 가장 바깥에 두고 싶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을 만치 불편한 가장 내밀한 심연일 양이므로. 일견 나쁜 예감이 틀리지 않는 이유는, 좋은 방향으로 제아무리 상상하려고 애써도 그리 나쁜 방향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필연의 근거를 그 자신의 무의식이 담지하고 있는 까닭일 테니. 그가 예의 욕망에 이입은 하기 싫어도, 어쨌거나 [이해]했다는 건, 그리하여 그처럼 꿈(서사)에 포함되어 등장했다는 건 언제고 그것이 그 자신의 일부였다는 말일 테니.
예를 들면, 조적 방어를 일삼는 혹자가 제아무리 스스로 긍정적이라는 형용사를 자처하더라도, 그가 애써 긍정하려는 건 당면한 현실이 아니라 그 자신의 관성(가령 전능감)일 뿐이듯. 그러니까, 그는 현재 마주한 그의 ‘불가능’을 수긍하고 긍정하기보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현실 부정) 미래의 ‘가능성’[만]을 긍정하면서, 자의적인 내면에 닻을 내린 저 “긍정적이다”라는 서술어에 더 밝은 색감을 ‘굳이’ 덧입히곤 하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에 직면하지 않고는 문제를 고칠 수도 없는 양으로, 심연을 목도하지 않고 목도했다고 주장만 해서는 심연을 설명할 수도 그에 한 치라도 더 다가갈 수도 없지 않겠나. 그리하여 심연은 날개 돋친 듯 푸드덕 푸덕 날아오르는 행복 회로가 아니라 그저 ‘나쁜 예감’에서[만] [오직] 발견될 양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우선 [긍정]해야 하는 건 바로 이 [나쁜 예감]이자, 원치 않은 [현실 원칙]인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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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몽
가령, 화려한 상상 속에서, 그러니까 산개(발산)한 기쁨 속에서 [나쁜 예감]을 솎아내는 것. 이를테면, 조적 방어에서 “불안”을 짚어 내는 것. 그처럼 해몽의 논리는 (무)의식이 어떻게든 피해 가려고 하는 그것을 바로 그 (무)의식 앞에 <누설>하기 위해 시작하고 끝맺는다. 물론 <비밀>은 누설되는 순간 다른 비밀로 대체된다. 비밀은 누설되지 않은 채 존속하는 게 아니라, 비밀이 누설되면 누설되지 않은 다른 비밀로 대체되며 비밀의 존재 여부만 계승되어 존속된다. 예컨대, 갓 태어난 아이의 심연은 생존 위협으로 본인도 모르게 억압당하고, 또 예컨대 그의 “전능감”은 또 다른 비밀이 되어 ‘의태’한다. 예의 전능감은 유예되어 ‘미래’에의 가능성을 꿈꾸게 할 수도 있고, 한 바퀴 돌아 과거의 “황금시대”를 가정하게 할 수도 있다. 요컨대 이 무수한 ‘의태’는 온갖 방법으로 [인큐베이터]와 [현실] 사이의 ‘다리’ 역할을 수행한다. 전능감을 억압한 ‘현실’에 대한 ‘원한(시기심/열등감)’은 그렇게 전치되고 유예되곤 한다. 공격성(원한)이 은폐되고 부정되지만 않는다면, 그 축이 비밀의 모양을 하며 이리저리 누설되고 다시 모습을 바꿔가며 흩어지고 유통되어 비판적 작동 논리(죄책감이나 인과적 직관 등)를 구축하고 고도화하는데 기여하며 유지될 수도 있으리라. 간혹 그러한 바와 같이, 유통에 ‘실패’해 고착되어 동어반복 속에 병리적으로 폐쇄되지만 않는다면.
생존과 같은 ‘필연성’들로 이루어진 심연의 [불안]을 가리기 위해 구성된 저기 저 감상과 인큐베이터는, 어쨌든 언젠가 어느 날 극복될 운명이다. 그러나 종종 감상과 생존을 혼동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혹자의 ‘자존심’은 그 자체로 ‘생존’ 불안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니까. 이를테면 고상한 이미지로 남겨지지 못할까 봐 ‘생존’ 불안을 자극받는 바와 같이. 스스로 연출되기 원하는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 불안을 겪는 바와 같이. 또한 그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하고 평범한 패배가 생존 불안에 연결되기도 한다. 손해를 조금 보는 데 대해 엄청난 생존 불안이 뒤따르기도 한다. 평판(예컨대 악성 댓글)에 생존 불안이 자극되기도 한다. 또한, 열등감에 자극되기도 한다. 저와 같이 ‘심연’은 그리 쉽사리 오해를 산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수한 자극의 파편들을 ‘심연’이라 오해하여 ‘자랑스럽게’ 주장하거나 반론을 펼치곤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그는 섣불리 ‘자존심’을, 고상한 이미지를, 자아상을, 승리를, 이익을, 칭찬을 정신의 본질 삼는 것이다. 그는 그 욕동들 사이를 지탱하는 원리나 그 배후에서 단 한치의 심연(필연성)도 들여다본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데 실패했을 뿐이지만, 그리하여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욕망을 이루어주지 않는 현실을 ‘욕구불만’ 속에서 그저 원망(불평)하고 있을 뿐이지만, 기실 바로 거기(욕구불만)에 ‘심연’이 있다고 (자기도 모르게라도) 주장하는 셈이다. [해몽]의 단위는 그와 같다. 그처럼 해몽의 단위는 ‘심연’이 아니라 ‘욕망’일 테니.
종종 환상 속 등장인물들은 ‘생존’을 등한시하고 ‘희로애락’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그들은 ‘필연성’보다는 당장의 우정이나 사랑을, 심지어 분노를, 혹 두려움을 위시하여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때 그들 각각은 욕망이 뒤섞여 움직이는 ‘감독’의 욕망 다이어그램 개별 요소마다의 화신이 된다. 이 욕망 기호들 중 누구는 소위 ‘이성’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기실 그는 감정이 없어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그저 감정을 더 많이 계산하여 그리 심연(필연성)을 들여다보는 까닭에 이성적이라 칭해지는 셈이다. 결코 감정 없이 이성적일 순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성적인 인간도 ‘당연히’ 그 동력으로 작동하는 감정이 있게 마련이고, 또한 그의 모든 행위나 사고에 기입된 이 의도가 설령 필연성(심연)에 비롯되었더라도 어쨌거나 궁극적으로 이는 ‘감정적인’ 목적이기 마련이니.
그리하여 등장인물들이 예의 ‘필연성’을 기준으로 사건마다 한 명씩 나가떨어지면, 그렇게 [나쁜 예감]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 비로소 그가 ‘심연(불안)’을 마주할 수밖에 없도록 종용당하면 비로소 그는 악몽 한 가운데서 바로 그 악몽을 ‘사용’해서 스스로 초기화되는 데 이를 수 있다. 그가 덮고 살던 아주 오래된 필연성(심연)을, 가령 그가 [조적 방어]를 통해 아주 오래 덮어 놓은 저 [불안]을 ‘어쩔 수 없이 목도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가 덮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점으로 초기화되자마자 그는 곧장 그 사태를 스스로 ‘다시’ 목도하는바. 거기서 그가 마주해야‘만’ 하(했던)는 괴물은 소위 비도덕적이거나 악마화된 자기 ‘욕망’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아상이 어떤 자명한 ‘필연성’을 인정하지 못해 덮고 지나쳐 곪아버린 사태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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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괴물
공포 영화는 관객을 위협하고자 한다. 여느 관객은 바로 거기에 이입하기도 한다. 때때로 그는 다른 관객들이 위협당하는 데서, 그들이 놀랄 것을 예감하며 기뻐하기도 한다. 그는 다른 관객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가학적) 상상 속에서 복수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영화 속 귀신은 종종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으며 압도적이다. 또 영화 속 괴물은 종종 기괴하고 억울하며 예측할 수 없다. 귀신, 괴물 등에 이입된 그의 자랑스럽고 [신비로운] 원망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흉물스러운 외양의 캐릭터에 이입해서라도, 그리 가상으로라도 ‘위협(학대)’하고자 한다. 그 자신이 언젠가 어느 날 당했던, 예컨대 ‘전능감’에 대한 ‘위협(피학)’에의 보복으로. 그리 ‘현실’을 (헛되이) ‘위협’해 ‘보복’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그는 사실 원망(시기심/열등감) 위에 살면서도,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목청으론 주장할 수 있다. 스스로 그리 믿을 수(자기 암시)도 있다. 허나 어쨌건 그의 원망은 만인을 향해 있고, 실은 만인 너머의 ‘현실’을 향해 있으리라. 그(우리)가 심연의 필연성을 목도하기 위해서는, 그 위에 덕지덕지 기워 놓은 정당화의 감상들을 [스스로]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정당화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과정 자체에서 그는 소위 ‘흉물스러운 괴물(또 다른 자신)’을 목도할 수밖에 없으리라. 말하자면, 괴물이 심연에 거주하는 게 아니라, 심연을 바라보고자 하는 과정이 이미 함께 살던 괴물을 시야에 보이도록 비추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그 누가 자신 있게 자기 정신에는 예의 ‘흉물스러운 괴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텐가? 과연 누가 자신 있게 스스로 인큐베이터 바깥에, 그러니까 ‘완전한’ ‘현실’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텐가? 과연 그 누가 지금 그가 살고 인식하는 것이 단 한 점의 환상도 섞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힘껏’ 어른을 흉내 내어 어른스럽게 극적인 목소리를 유지하고자 그리 다 알겠다는 담담한 표정을 간절히 안달복달 집착해 연출하며) 말할 수 있을 텐가 말이다. 설령 유아가 극복될 운명일지언정, 그리 ‘완전히’ 극복한 이는 누구도 없으리라.
따라서 소위 ‘공포 영화’야 말로 저기 저 원한의 지점에 대한 [초기화]의 증거물로써 심연에 직면한 아주 날것의 기록일 수 있지 않겠나. 따라서 ‘악몽’이야말로, 그가 극복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극복하고자 한다는 노력의 명세서가 될 수 있으리라.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은 가장 행복한 환상이 아니라 [나쁜 예감]으로써의 [악몽] 내부에서도, 우리가 이입하기는 싫으나 [이해]할 수는 있는 [외계의 자기 자신]인, 바로 그런 [괴물alien]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