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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Aug 03. 2024

드라마 ‘더 에이트 쇼’ 리뷰

지배자의 사고방식

흔히 이야기하는 ‘수저론’은 그 뿌리부터 ‘자수성가에의 선망’과는 결을 달리한다. 차라리 그 ‘수저론’과 결을 같이 하는 건 일종의 ‘선천성에 대한 선망’으로써의 예컨대 ‘천재’의 신화일 양인데. 여타의 ‘선민의식’들이 제아무리 여러 종류의 명분(체질)을 둘러 세워도 결국 마찬가지의 감정적인 전제를 토대한다. 그러니까, 요는 ‘노력’에 대한 ‘혐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카드 뽑기가 ‘우연한’ 계급을 결정하듯, 삶에 적응하면서 소위 ‘지배자의 사고방식’이라는 나약하고 얄팍한 신화가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지배자로서의 주체는 응석을 배설할 수 있는 권한자로서의 주체다. 여기 이 주체의 신화는 입법자의 신화와 유사하다. 이를테면, 내가 동의하지 않은 사회의 규칙을 따를 수 없다는 식이다. ‘타자의 폭력’은 ‘비대해야 하는’ 주체의 신화에 방해나 될 따름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규칙을 지정하겠다는 의지는 책임론을 한참 벗어난다. 요컨대 책임질 수 없는 호언장담을 하는 유체 이탈된 뜬구름의 주체들이, 바로 그 호언장담 뒤에 숨어서 자랑스럽게 호의호식하고자 하는 자의적 계급론이 거기 자리한다. 그리하여 발언의 시간 시점마다 변명을 찾는 뜬구름의 기술이 요청된다. 가령 군중의 ‘정서(상상)’를 ‘존중’한다는 양 온갖 시기심을 자극해 진영(체질)을 나누곤, 차후엔 의도적으로 혼란(혼동/몰이해)을 자초해 예의 ‘호언장담’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절차를 은유적으로 흐지부지하는 등으로.

그러므로, 그와 같이 피해자의 자리와 저기 저 권력자의 자리를 동시에 탐하는 탐욕은 스스로 ‘천재’ 혹은 ‘선민’을 자청할 수밖에 없나 보다. 타고난 선천성의 자의적 ‘우월함’이 ‘평등’이라는 공론 아래 연이어 훼손되어 왔다는 환각 속 자의적 ‘피해’를 스스로 복구하기 위하고 있다는 그저 오로지 자의적이기만 한 저 도덕(명분)으로써,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권력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 자체 도덕을 연이어 갱신하며 그리 거듭 자청하는 특유의 응석에의 배설이, 그처럼 권력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단숨에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양태(체질)들이 이토록 우르르 발견되는 도시의 시대가 아니던가. 요컨대 외부와의 격리를 그토록 자청하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소위 ‘객관적’ 환경에의 노출을 꺼리는 ‘주체적’ 거리낌이 도리어 주체성의 신화라는 자랑스러움으로 돌변해야만 ‘겨우’ 안심할 수 있는 기이한 전치를 우리는 어찌나 자주 확인하던가. 허나 자의적이고도 피상적인 예의 유사 도덕에의 급조된 천착은 그저 도덕의 이름을 빌린 정당화에 그가 어찌나 의존하는지나 전시할 뿐일 양이니.


그러므로 여기서의 ‘주체성’은 객관성의 반대급부라기보다는, 그저 노출하기엔 너무나 켕기는 수많은 사고방식에 대한 ‘격리’된 내부 정당화를 ‘자족’이라는 이름을 매개해 자랑스러움으로 ‘어서 빨리’ 번역하고자 하는 도피성 의지의 다급함에 다름 아니다. 가령 주체성이나 객관성이나 그저 상황과 관점에 대한 개념일 뿐인데도, 거기에 굳이 형용사를 발라 뭔가 애초에 활용되었던 개념 이상의 ‘이원화’된 차이를 ‘이미지’적으로 애써 만들어내는 경향성이 늘상 지목하는 게 있지 않겠나. 그대로 두면 작동할 ‘객관성’이 너무 비인간적이라거나 기계적이라거나 그런 종류의 덕지덕지 발린 ‘형용사’들은 그저 객관성의 성질이 그러하다는, 마찬가지로 주관성이 성질이 어떠하다는 그런 작동 논리들을 다만 감당할 수 없다는 고백에 불과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사소한 무엇을 바꾸기 위해서조차, 일단 오늘의 작동을 그저 바라보고 상태 그대로를 분석한 이후에야 비로소 방법을 찾고자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객관성’으로부터 헐레벌떡 격리된 이후에야 겨우 본체를 드러내는 소위 ‘지배자의 논리’는, ‘굳이’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없는데도 등장하는 다만 배설 이상이 될 수 없지 않나. 여기서의 문제는 언제나의 우위가 [‘이원화’된] ‘우열’의 ‘비교’우위라는 점에, 심지어 그렇게 비교우위를 폭력적이건 형용사적이건 그리 주장하지 않더라도 딱히 문제가 없는데도 그 문제를 굳이 지명하고 만들어내어 자의적 우위를 그토록 만끽하고자 하는 데서 생긴다는 점에 있지 않던가. 게다가 사고방식은, 그게 어떤 양식이건 간에 그저 삶이 지속됨에 따라 여실히 드러날 텐데도, [미리] [선제적으로] 거기에 달린 라벨을 굳이 예의 우열 등으로 ‘이원화’하여 비하하거나 찬양하며 시도하는 만끽에서 전시되는 건 기성의 라벨에 대한 다만 ‘열등감’일 뿐 아니겠나.

격리 이전 어떤 삶을 구가했건, 그 삶에 의문을 표하기보다 그 삶이 소위 ‘자랑스러운 자족’ 안으로까지 들어와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하는 어떤 조마조마함이, 상대가 누구든 일단 눌러놓고 보려는 ‘선제적’ ‘행동’을 반사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던가. 이처럼 종종 혹자의 폭력은 정신적 열등감을 형용사적이고 실천적이며 가학적인 시도에서의 ‘적개심’으로 여실히 그 양태를 드러내곤 하는바. 그처럼 때마다 얼개(프레임)를 처음부터 자기 위주로 다시 구성하고자 그토록 입법자를 ‘어른스럽게’ 자청하곤 하는 이 열등감의 반사적이고 자동적인 ‘실천’ 양상은 이미 작동 자체의 근거부터가 모조리 열등감에서 비롯되었음에 대한 증명이며, 예의 ‘실천’이 성공한 이후라도 그는 차후 환경에의 대응들과는 상관없이 영영 예의 열등감 안에서 살 것이라는 재차 증명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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