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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Jul 21. 2024

연출 양태들

도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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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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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원본성
- 누드
- 자본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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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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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이 친구에게 아빠에 관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친구와의 비교 우위에 괜히 서고자 할 적과 같이, 옆사람과 비교하여 우위를 ‘굳이’ 선점하고 싶은데 그에 관한 ‘노력’은 혐오스러울 때 어떤 ‘원본성(혈통/체질)’을 들먹이곤 하는 사태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하곤 하던가.

이를테면 ‘수저론’이 그러하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비교는, ‘우연한’ 출생에 그 의의를 두고 있다. 요는 이 나약한 ‘비교론’이 삶의 자기 분야에 그저 집중하는 게 아니라, 뭐든 비교해서 옆사람에게 열등감을 좀 주입하는 데 아울러 스스로 우월감에 으스대고 싶은 얄팍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곧, 여기 이 ‘선천성’에 대한 선망은 ‘노력’에 대한 ‘혐오’를 힘껏 합리화한다.

예의 ‘선천성’의 명분을 위해 아이들은 쉽사리 시간상의 ‘우선권’을 주장한다. 소위 ‘저작권’을 떠올리게 하는 이 ‘투사’ 패턴은, ‘내가 먼저 생각(의도)했어’라는 식의 문장에서도 쉬이 드러난다. 예컨대 누군가 일구어낸 사업에 관해 혹자가 손쉽게 떠들 적에, ‘나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어쩌면’ 저기 저 사업가보다 먼저 떠올렸다는 겸손함을 가장한 목소리의 뉘앙스가 애써 무슨 억울함을 ‘어른스럽게’ 움켜쥐고 있는 자칭 어른의 나이 든 모양새도 종종 발견된다.

‘저작권’의 원시 형태인 여기 이 시간상의 ‘우선권’은, ‘노력’에 대한 과정을 힘껏 건너뛰면서, 누가누가 더 시간상으로 먼저 생각했는가를 아웅다웅 다투게 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숭고’에의 형용사를 덧대면서 만들어지곤 하는 신비로운 ‘기원의 신화’라는 욕망 구조의 (진정한) ‘기원(체질)’이 있다.

과연 어떤 발상이 ‘현실’에 유효할 것인가, 혹은 우리 ‘정신’에 유효할 것인가, 또는 관람객의 ‘감동’에 유효할 것인가와는 아주 완전히 별개로, [누가누가 먼저 떠올렸는가?]를 염두엔 둔 아웅다웅이 그 저변에 [누가누가 더 대단한가?] 또는 [누가누가 더 잘났는가?]에 대한 스스로 숭고하다 주장하는 아웅다웅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멋들어진 형용사를 덧대어, 그러니까, [누가누가 더 잘났는가?]에 대한 아이들의 아웅다웅은 근엄한 형용사와 명사로 덧대어져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연출된다. [과연 어떤 작품이 인간의 기원 혹은 심연, 그러므로 본질적인 ‘노스텔지어’를 제대로 다루고 있는가?] 나아가 [과연 어떤 작품이 가장 기원(본래성)에 있는 작품인가?]에 대한 심각하고 진중하며 짐짓 어른스럽기까지 한 모양으로 연출된 ‘아웅다웅’은 과연 그 늠름한 영향력을 어디까지 미칠 양인가?

형이상학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론이 더 근본을 지명하는가? 하는 질문에서조차, 기실 ‘근본’이라는 개념 자체도 우리 인식의 결과물이며, 제아무리 어떤 개념이 더 ‘근본’에 있는지 아웅다웅하더라도 ‘근본’이라는 개념부터가 여러 개념의 원인이 아닌 ‘결과로써의 개념’에 불과하지 않던가. ‘수저론’ 또한 개인들의 내적 인식 간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로써 탄생한 ‘선천성(체질)’에 대한 선망에 불과하지 않나. 그 어휘가 아무리 원인을 지목하고 있다고 ‘아웅다웅’ 주장하더라도,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원인과는 동떨어진 ‘결과’임이 틀림없으므로. 그리하여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관이 무언가 지명하고 있다고 제아무리 누군가 주장하더라도, 오직 ‘논증’을 통한 유효성의 확인이 아니고서야 그저 ‘아웅다웅’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지 않겠나?

그리하여 기실 이야기되는 ‘원본성’조차 온갖 작품이 복제되고 있는 현 사태의 ‘복제성’의 반대급부로서 등장한 ‘개념’일 텐데. 이는 원본이라는 개념이 애초부터 복제 가능성이라는 기술적 시대상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저자는 바로 이 ‘복제’라는 사태 이전의 ‘아우라’를 복제 가능성에서 파생된 ‘원본성’과 다르다는 양 묘사하기도 한다. 가령 ‘최초’의 작품으로 일컬어지곤 하는 ‘라스코 동굴 벽화’에는 이 시대의 원본성과는 다른 복제 불가능한 아우라가 있었을 거라 주장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아우라는 관람객의 ‘기분’에 대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이고 기원적인 뭔가가 벽화에 있었을 거란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기실 여기서도 ‘최초’를 주장하는 ‘기원성’에의 천착(아웅다웅)만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 ‘최초’에의 천착은 예의 ‘아빠에 대해 자랑하는 어린아이들의 말본새’처럼, 어떤 ‘원본성’을 주장한다. 기실 차후 모든 역사 속 작품의 원본이 되는 작품이자 기원적 작품이라는 아웅다웅이 그것이다. 이 자랑스러운 ‘노스텔지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소요되는 기술적 노력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적 노력조차 필요 없는 날것이자 심연으로써의 ‘원시인’이라는 선천성을 가정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숭배되는 건 날것의 인간성, 원시성, 본능 등이지만, 기실 어느 시대건 우리는 우리 삶의 기술을 ‘후천적’이고 ‘인공적’으로 연마해서만 겨우 살아왔을 텐데. 여기 숭배의 양상으로 숭배자가 실제로 숭배하고자 하는 사태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누구에게나’ ‘노력 없이’ 있는 그대로 숭배받고자 하는 숭배자의 전치된 ‘증상(체질)’에 불과할 양이리라.

그러나 소위 ‘원본성’은 사실 ‘복제성’의 상대 개념에 불과하다. 복제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원본이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심지어 예의 ‘복제’가 엄청나게 증식하는 ‘기술 복제 시대’에 이르러 말하자면, 바로 이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기술 복제 시대’라는 시대성에 의탁하여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소위 ‘라스코 동굴 벽화’가 제아무리 무수한 모든 작품들의 ‘원본’을 참칭하더라도, 예의 벽화를 ‘원본’으로 칭하는 관점 자체가 이미 ‘기술 복제 시대’에 의탁한 관점일 뿐만 아니라, 원본으로서의 ‘아우라’조차도 “기술 복제 시대”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예의 ‘벽화’의 유효성에 관심을 두는 순간, 우리는 이 ‘벽화’에서 날것의 인간성이나 심연의 노스텔지어가 아닌, 그저 ‘당대의 “인공적인” 문화’ 정도만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니까. 이를테면 그려진 동물의 눈동자에 새겨진 ‘죽음에의 공포’가 거꾸로 당시 그림을 그렸던 문화인의 “인공적인” 사상에, 소위 ‘사냥’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는지 등과 같이.

이를테면 소위 심연에의 탐구는 형용사만 갖다 붙이며 선언적으로 주장만 하는 행동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임상적이고 논증적인 방식으로만 유효할 탐구의 일종일 양이다. 설령 그것이 작품에 의한 은유를 경유하더라도. 그리하여, 차후 언젠가 우리는 심연이라는 ‘가장’ “인공적인” 장소에 발을 들일 수도 있으리라. 다분히 “후천(반-체질)적”인 노력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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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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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누드’가 전시하는 게 그저 벌거벗음이 아니라는 건, 그리하여 거기서 남김없이 전시되는 게 그저 개인적인 ‘노출’이 아니라 ‘은밀한’ 무엇까지도 남김없이 모조리 노출된다는 연출 자체라면 기실 여기서 작동하는 전시가 가지는 방향은 진정 ‘모조리’ 노출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짐짓 ‘모조리’ 노출하고자 하는 양 보이고자 하는 ‘연출’ 양상이라 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평범한 삶에서 마주치는 일상성보다 흔히 회자되는 일종의 ‘음모론’을 종종 더 흥미로워하는 까닭 또한 저와 같지 않던가. 감춰진 비밀을 짚어낸다는 행위는 마치 비밀과 비밀 아닌 모든 것들을 모조리 짚어내는 듯한 착각을 가져온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예의 일상으로부터 동떨어진 거시 담론 등에 속한 ‘음모론’을 답습하며 이 특수하고 거시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일상의 미시적인 요소까지도 단숨에 꿰뚫는 듯한 ‘자기 충족감(과대 자아)’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흔한 관음증도 있다. 상대의 치부를 ‘굳이’ 찾아 나서고자 대화의 주제를 은근하게 비틀거나, 또 ‘굳이’ 상대의 내밀한 비밀을 들을 만치 친밀한 관계가 되고자 애쓰는, 그리하여 본래는 타인이 알기를 원치 않는 당사자의 고백을 통해 당사자의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자부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어찌나 자주 발견되곤 하는지. 이는, 관계에서 ‘누가 누가 더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가’하는 유아기 탁상공론에 매여 있는 결핍의 족쇄(체질)에서 주로 발견되지 않던가.

그러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비밀스럽지 않은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자동으로 추가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혹자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다 해서, 벌거벗지 않은 나머지 모습, 혹은 설령 벌거벗었더라도 그리 연출된 양상과는 다른 모든 모습까지도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마찬가지일 양이다. 우리의 첫 번째 타인은 늘 우리 자신인 까닭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아무리 잘 알고 있다손 연출하고자 하더라도, 그 누구도 자랑스럽게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달아’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양이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뿌리 깊은 ‘비밀’을 어찌어찌 알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그 나머지 또한 ‘저절로’ 알게 되는 게 결코 아닐 양이므로. 그러나 그럼에도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자랑스럽게 주장하며 (예컨대 평판 등을) 관철하고자 하는 연출은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 따위를 저 흔한 섣부른 확신 속에서 ‘정지된 하나의 뚜렷한 이미지(체질)’로 그토록 쉬이 지칭하곤 하지 않던가([나는 ‘원래’ 그렇다]는 대사에서처럼).

저와 같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자의적으로 지정한 후 스스로의 평판을 거기에 끼워 맞추기 위해 임의의 관객들에게 이를 주장하여 관철brainwashing하고자 하는 건, 마치 ‘누드’의 등장인물이 거울을 보는 바와 유사할 모양이다. 등장인물은, 연출을 위해 바로 그 연출의 대상인 ‘관객’의 시선으로 거울 너머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모양이니. 미리 기획하고 투사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그리 온갖 고뇌에 대한 ‘답을 미리 정해놓고’. 따라서, 거기 작동을 멈춘 고뇌의 자리는, 오직 고뇌하는 듯한 연출에만 그토록 사력을 다하는 포즈로 대리될 양이다. 그리하여 어찌저찌 의기양양하고자 애쓰는 바로 이 ‘누드’가 ‘고뇌하는 포즈’를 하고서, ‘심각하고’ ‘어른스럽고’ ‘성숙하고’ ‘진중하게’ 스스로 연출하며 관객의 관심을 저토록 애원하는 모습을, 우리는 그리 간헐적이지만은 않게 목도할 수 있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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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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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종 마주하는, 질문보다 ‘굳이’ 선제적으로 재빨리 발설되곤 하는 혹자의 답변(소개)이 뜻하는 바가 있을 텐데. 가령, 당사자가 읊어 대는 그 소개가 그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구성되고 있다면, 차라리 소위 언급하는 ‘사실’에는 부합할 순 있으리라. 그러니까, 그가 소개를 가장하고 (고상하게 에둘러서든 직설적으로든 간에) 수행하는 ‘광고’ 선전 문구의 출처가 이미 일어난 과거에 기반한다면, 최소한 ‘사실’이기는 할 모양이니.

그러나 예의 ‘선제적인 소개’는 타인에게 인식되는 자기 이미지(첫인상)를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된 시도라는 점에서,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그가 발설하는 ‘신뢰감’을 연출하려 짐짓 구색을 갖춘 이 ‘목소리’의 표적은 ‘정보 전달’보다야 ‘주장에의 관철’에 심히 기울어져 있을 양이다. 그처럼 그가 원하는 자기 이미지를 타인의 정신에 관철하고자 한다면, 그리 스스로 원하는 자기 모습을 자기 자신에의 불변 ‘이미지(체질)’로서 타인의 뇌리에 각인하고자 한다면 그는 필히 타인의 정신을 관리brainwashing할 수 있는 권한을 참칭하고 가장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러한 권한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거나 ‘도덕적’이라거나 등등의 여러 정당성에의 옷을 덧입기도 한다.

이는, 호화 여객선 위로 승객들이 입장하면서 ‘일상’의 고통을 매개로 여객선에서의 휴식을 필연적인 필요로 가장하고자 애쓰는 양상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저 돈을 좀 써서라도 호화롭게 쉬고 싶다고 말하는 여느 객들과는 달리, 어떤 이들은 ‘제대로’ 된 휴식이 ‘필요’해서 그리고 그 휴식은 ‘호화 여객선’에서‘만’ 가능한 까닭에 그가 여객선의 입구로 올 수밖에 없었다는 ‘선제적’ 광고를 ‘굳이’ ‘우선’ 주변인에게 일단 수행하도록 하는 어떤 추동력이 거기 미리 내재하는 것이다.

예의 추동력은 그리 포장된 정당성들을, 그러니까 그가 그 자신을 그렇게 ‘광고’할 수밖에 없게 한다고 주장하는 신념적이고 관념적이며 상상적인 조건들을 딛고 서 있을 모양이다. 그 ‘광고’의 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실 그 ‘광고’의 내용이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러니까 사실이더라도) 그리 연출하고 ‘광고’하고자 욕망하는 그들의 욕망이, 그렇게 타인의 정신을 관리하고 조종하여 ‘타인의 정신에 자기가 원하는 자기 이미지를 각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보다 ‘우선’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타인은 오해할 수 있다. 또한 누구도 저 모든 오해를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나 특정 오해를 ‘필히’ 바로잡아야 한다는 어떤 (도덕적) 정당성은 종종 타인의 정신을 관리하고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토록 자주 품은 채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유서 깊은’ 유화의 전통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 이미지를 의뢰하는 의뢰인이, ‘자기 소유의 거대한 자연’ 복판에서 ‘진중하게’ ‘고뇌하는’ 철학자의 이미지로써 스스로 유화에 보존되고자 하는 저 무수한 욕망‘들’은, ‘광고’로써의 유화가 그 자신의 진심(욕망/내용)이 ‘진중하게’ ‘고뇌하는’ 과정의 결과로써 ‘자연에서 발견된 저 철학적 심연’을 지목하고 있길 바라지만, 거기서 드러나는 건 바란 그대로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그리 보여지길 바란다는 예의 ‘욕동(체질)’들 뿐 아니겠나.

그와 같이, 촉각을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정교한 회화가 가능했던 유화가 마침내 그 기능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게 ‘의뢰인’인 ‘지주’ 본인이 타인에게 보여지길 ‘희망’했던 자기 ‘이미지’이자 그리 연출된 방식으로 타인의 정신에 관철되기 바랐던 스스로의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점은, 기실 당시의 예술 작품이 이미 오늘날의 SNS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얼마간의 단서일 수도 있으리라.

당시의 유화가 의뢰인이 가지고 있던 ‘부’나 ‘고상함’이나 ‘영향력’이나 여타 그 무엇에 관한 ‘광고’였던 간에, 그것이 기정사실에 관한 일종의 강조로써의 연출일지언정 ‘사실’에 기반했다면, 오늘날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는 바로 그 기정‘사실’이 바뀔 수 있으리라는 ‘상상’ 혹은 ‘약속’에 기반한다 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과거나 오늘날의 광고 둘 모두는 각각 ‘의뢰인’과 ‘시청자’들이 어떻게 보여지길 원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을 양이다. 사실이건 아니건, SNS상에서 확인되는 부유하거나 세련되거나 현명하거나 고뇌하는 등등으로 연출되어 보여지고 또 타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도록 조종하고 관철하고자 하는 욕동(체질)을, 비로소 오늘날의 광고들이 곧장 낚아채고선 바로 그 욕동의 ‘선망받는’ 성취를 앞다투어 약속하며 계승한 이 ‘전통적인’ 매혹을 거듭 시도하고 있을 모양이니.

저자의 말마따나, 실상 광고에서의 ‘유효한’ 미끼는 욕망이 성취될 수 있다는 양의 가능적 유효성이 아니라, 예의 욕동에의 성취를 자극하는 ‘이미지’가 소비자(의뢰인과 시청자)들이 스스로 보여지길 ‘희망’하는 이미지(환상)와 과연 ‘동일’한지의 여부에 불과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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