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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드라마 ‘아케인’ 리뷰

필연의 논리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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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차


1 혼미한 혼동

2 필연의 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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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미한 혼동


소위 이야기하는 ‘발전’을 위해 우리는 얼마간 현실로부터 미래를 [추리]하며 그리 현실에서 벗어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을 위해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바로 이 인식에서 ‘추론’이 출발한다. 단위 필연성은 일종의 유효성을 가져온다. 선결 당연함에서 후결 당연함을 연이어 연역할 뿐 아니라 그게 유효한지 무수하게 시행착오 하면서야 우리는 나아가는 것이다. 추론과 그저 상상 따위의 유효성은, 이 추론의 언젠가의 연원이 상상에 있다 하더라도, 바로 여기서 나뉜다. 얼마나 유효한 추리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비단 과학과 철학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유효성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따라 그 과녁은 종종 ‘감동’이나 상상력에 대한 ‘놀라움’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떤 ‘재능’ 있는 창작자는 역설적이게도 더욱 ‘유효한 경이로움’을 가진 ‘상상’을 추리하여 산출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추리’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굳이 ‘도덕’이나 ‘의무’의 문법을 논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유’라는 문법 안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만큼의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아주 기본적인 자유라는 개념적 정의를 이미 알고 있지 않던가. 특정 자유가 다른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이 되지 않기 위해, 의무나 도덕조차 아닌 기본적인 ‘거리’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 있다. ‘자유’를 누리며 호르몬을 배설하기에 앞서, 그 어떤 민폐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도덕’이나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라는 ‘개념’의 문법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와 같이 ‘추리’의 자유는 ‘상상’의 자유로 소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를 인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정하기까지 위해 ‘굳이’ 적극적으로, 또한 온 힘을 다해 [혼미]하게 [혼동]하곤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자유롭게 ‘추리’하는 데엔 그리 찾아낸 임시 답변의 검산이 필히 뒤따른다. 시행착오 끝에 도달하는 자리가 어디든, 그는 그 자신이 처음 원했던 혹은 상상했던 어딘가가 아닌 의외의 장소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롭게 (추리 아닌)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원하건 그렇지 않았건 이미 떠올렸던 어딘가를 목적지로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봐야 ‘상상’의 출발점만큼이나 ‘상상’의 도달점 또한 예의 ‘상상’의 한계 안에 [꽉 막혀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물론 여기 ‘상상’에도 [괴랄한] 필연성은 자리할 양이다. 그처럼 ‘상상’과 ‘추리’를 나누는 건, 그러니까 그 추리가 가령 상상에 대한 추리일지언정, 필연성의 [유무]가 아닌 필연성의 [정도]일 양인데. 유효성은 필연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있는지를 증언하는 덕택이다. 이는, 여느 규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모양이다.


예컨대, 헌법에 명시된 권한에 조건이 따라붙어 그 조건 없이 권한이 발동될 수 없다면, 그리고 그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달성되지 않은 그 조건을 현실에 억지로 짜맞춘다면, 그건 헌법의 논리를 ‘추론’한 게 아니라 [상상]한 것이다. ‘공적’ 업무가 아니라 ‘사적’ 소꿉놀이를 위해 ‘민폐’를 무릅쓰고 ‘사적’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 이는 자유와 도덕(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라는 개념을 얼마나 어떻게 [혼미]하게 [혼동]하느냐의 문제일 텐데) 그러나 한 톨이라도 타인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사적’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그처럼 원하는 이상으로 현실을 적극적으로 착각하기 위해 자기 나름의 ‘필연성’을 [어른스러움과 정당성을 가장하여] [흉물스럽게] 주장하는 행위는 [괴랄한] 필연성을 가질지언정 아주 낮은 위계의 [모호한] 필연성만 가질 터다. 어쩌면 ‘자유’라는 개념을 그리 자의적으로 해석하듯, ‘책상’이라는 ‘개념’ 언어에 책을 올려두려다 실패한 분노(자유)로, 또 ‘의자’라는 ‘개념’ 언어에 앉으려다 (의자라는 개념은 의자가 아니라서) 실패한 분노로 저기 저 [어른스러움과 정당성을 가장하여] 시대를 개탄하는 [혼미]한 [혼동]을 자랑스럽게 배설할 수도 있으리라.


요컨대 소위 ‘망상’에도 필연성은 있을 테지만, 그 필연성은 현실에서의 유효성이 아니라 그저 그가 정서 발달단계 중 어디쯤 [영영] 머물는지에 관한 ‘필연적인 증명’만을 수행하는 ‘필연성’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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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필연의 위계

물론, 폐기되어야 할 무효한 [망상]을 제한다면, 그리 작금의 유효성을 토대로 완전한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논의는 각자의 취향에도 연관될 수 있으리라. 그처럼 여느 제도 변화(발전?)의 양상은 얼마간 관점의 문제일 수 있을 양이다. 그리고 그 취향이 관련짓는 것은 일종의 우선순위에의 주장을 동반하기도 한다. 가령 경제로 치자면 성장 우선의 논리와 분배 우선의 논리가 그 전통적인 담론의 양대 축을 구성한다 가정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다분히 감상적인 이 진영논리가 MBTI나 혈액형에 버금가는 심리테스트를 구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어쩌면 이 심리테스트에 기반해서 얼마간 소속감과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을 양이다(나도 너와 같은 A형이야, 너는 나와 달리 외향형인 E야, 나는 너와 달리 진보 혹은 보수야, 등).

허나 우리 각자가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그리는 ‘미래’가 그리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그리는 ‘미래’ 각각이 ‘완전함’이 아닌 그저 ‘다음 스텝’에 그친다손 치더라도 예의 ‘다음 스텝’이 다분히 ‘더’ 완전함에 가까우리라는 어떤 추리가 예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우리는, 양껏 [감정에 호소]하기도 하는 것이다. 망상을 제한 추리에서조차 우리는 이상향을 가정한다. 그 이상향이 알 수 없는 것이더라도, 우리의 지금을 이루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면 우리가 모르는 장소로라도 예의 ‘이상향’이 추리되고 도래할 수도 있다며 우리 자신도 모르게라도 믿곤 하는 것이다. 그처럼 언제나의 ‘과정’은 늘 스스로가 겨눈 목적지를 자기도 모르게라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과정과 목적지로 이분할 적 우리는 과정만으로는 종종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의 희미한 목적지라도 가정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도 설득할 수가 있었던 모양이므로.

모든 설득의 시도들이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거기엔 ‘정도’의 ‘위계’가 자리한다. 필연성에도 위계가 자리한다. 상상부터 추론까지의 위계들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현실’을 ‘긍정’하느라 (정당성과는 별도의) ‘가능성’에 위계를 매긴다. 어떤 가능성은 낮은 필연성을 가지므로 ‘덜’ 유효한 한편 어떤 가능성은 ‘더’ 유효할 수 있다. 이리 순위 매겨진 유효성을 토대로 가상을 [선별]하지 ‘못’ 한다면 우리의 ‘상상’은 ‘추론’으로 [발달]할 수 없다. 허나 우리는 가능성에 순위를 매길 뿐, 그리 매긴 가능성의 순위를 끝내 증명하는 건 당사자 아닌 역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과거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역사가 된 가능성을 토대한다. 우리는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도 가장 필연성이 높은, 그러니까 가장 유효한 (개별) 현실을 (특히 각자의) ‘과거’로, ‘역사’로 가지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그 자체로 최대 필연성의 증거 아니던가. 가장 필연적인 가능성만이 현실이 되(었)고, [시간]은 [오직] 그렇게[만] 흐른다. (특히 각자의) 역사는 그 자체로 가장 유효한 가능성의 (연역적이기에 앞서) 귀납적인 결과물이다. 우리는 ‘미래’에 관한 한 각자의 무수하고 다양한 [가능성] 앞에 서 있지만, ‘과거’에 관한 한 각자의 가장 유효하고도 ‘유일’한 단일 [필연성]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그처럼 가장 가능했을 과거를 필연으로 쌓아 올린 결과가 비로소 ‘오늘’이지 않겠나.


이를테면, 전지전능한 인격으로서의 저 유명한 ‘신’으로 치더라도, 예의 이 ‘신’은 무수한 가능성 중 자신이 가장 원하는 가능성이 구현된 결과를 ‘현재’로 구성하지 않았겠나. 무수한 가능성을 전부 아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요(전지), 그 가능성 중에서도 가장 원하는 것을 구현하지 않았다면 그는 전능한 것이 아니지 않겠나.


기실 그처럼 이러저러한 신의 존재 증명이 중세의 언어 문법에 의존한 문법상의 증명에 불과하더라도 어쨌거나 오늘은 그가 가장 원했고 가장 공을 들여 만든 유일한 결과일 수밖에 없어야 하지 않겠나. 다시, 그에게 욕망이 없다면 그는 우리가 소통할 인격이 아닌 것이고, 그의 욕망대로 세계가 구성되지 않았다면 그는 전능한 것이 아니며, 그가 세계의 불가지론적인 복잡계의 모든 경우의 수를 일일이 알지 못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아는 게 (전지) 아닌 셈이겠으므로.


그와 같이 현재는 [가장] 필연적인 과거의 결과인 동시에, 미래를 산출하는 [가장]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할 터다.


달리 또다시, 저 흔한 시간 역설 중 하나를 예로 들 수도 있으리라. 자신의 과오를 고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 인간은 역설에 빠진다. 그의 인과는 다음과 같다. 과거로 돌아간 원인이 자신의 과오이므로 그가 자신의 과오를 고치는 순간 그리 과거로 돌아간 이유가 사라진다. 이 역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해결이 추리되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평행우주일 텐데. 혹자는 그가 과오를 저지른 우주와 과오를 저지르지 않은 (과거를 수정한) 우주로 우주를 나누어 이를 해결한다. 그러니까, 세계를 하나 추가하는 방법으로 이 역설을 해결하고자, 소위 ‘평행우주’를 기존 우주에 추가해 버리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제 무수한 우주가 매 선택에 따라 연이어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오를 저질렀던 그의 개별적인 시간 속에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행위뿐만 아니라 돌아가기 전의 우주까지 연속적으로 포함된 우주[만]이 유일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겠나. 그가 자신의 과오를 저지른 것이 필연적이었던 만큼 저지른 과오를 고치고자 하는 시도 또한 필연적이었고, 시간을 제아무리 과거로 돌렸더라도 그 개인의 역사를 추론할 때 관람자인 우리는 그의 개별 시간을 축으로 추리할 수 있다. 즉 그의 양 갈래 우주의 동일 시간 각각은 변수 중 하나가 되겠지만, 인과관계로 흐르는 별도의 개별 ‘시간’ 속에서 ‘그의 과오를 저지른 과거’는 일종의 과거 원인 중 하나가 되어 다시 수정된 과거를 상대적 미래 삼으며 그에 통합된다. 그가 과거를 바꾸었던 까닭이 바꾸기 전 과거 때문이라면, 각각의 병렬적인 과거는 일렬로 정렬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전혀 역설을 일으키지 않는다. 거기서 그가 시간여행을 결심한 순간은 그 자신의 [개별] 시간상에서 ‘과오를 저지른 과거’를 [과거]로 가지고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수정된 과거’를 [미래]로 가지는, 전혀 역설적이지 않은 ‘평범하디 평범한’ [익명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저 과오를 고친 개별 개인의 측면에서 그의 과거를 돌아보면 다만 가장 가능했을 만한 가능성이 현실로 구현된 ‘유일한’ ‘필연적’ 과거가 그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유일’하고 (가장) ‘필연’적이며 익명적일 만치 ‘평범한’ 우주, 단 하나의 [가장 유효한] 우주에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상상 아닌] ‘추론’)가 그러하듯.


비로소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이 [익명]의 [단일]한 (일상의) 시간은, [만약 …였다면]이라는 ‘가정(가능성)’의 [유효성] 따위까지도 남김없이 모조리 병합하여 반영한 ‘가장’ [필연]적이며 [유일]한 [현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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