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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결핍의 논리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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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차

1. 충돌
2. 병렬 시간
3.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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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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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가정되는 최초의 우주는 나와 남이 구별되지 않는 영아 상태와 유사할 텐데, 그는 타인을 꼬집어도 그 자신이 아픈 양 굴었는지도 몰랐다. 그처럼 무수한 태곳적 신화가 예의 융합 상태를 가정하는 게 독립된 자아를 구성하지 못하는 영아 상태를 은유하고자 함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개체 발달이 계통 발달을 은유한다면, 그리하여 한 개인의 역사가 우주의 역사를 표징하고 있다면, 따라서 세계의 구조가 프랙탈과 같이 그저 부분이 전체를 담지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손쉽게 [완전한] 진리에 [도착]적으로 도달할 수 있겠는지. 자랑스럽게 게으른 여느 혹자의 변명처럼, 그저 자기 내면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믿고 싶어질 적 우리는 천재의 신화를 [어서 빨리] 구성하고 자칭하며, 비로소 그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알았던 어느 날에라도 혹자에게 그 칭호를 부여하며 대리만족하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종종 여러 재능을 언어 문법적으로 경솔하게 가정하여 영아 상태로 [헐레벌떡] 퇴행하여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허나 그처럼 단박에 세계를 설명하고 주인공이 되면서 세계 전체가 곧 내가 되는 영아 상태, 그 유일자의 우주는 언젠가 어느 날 운석 하나로 깨어졌더랬다.

기실, 시일이 지나고 예의 운석에 의한 흉터를 바라볼 적 우리는 의심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연 이 운석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여느 구전의 전례대로 그 이전의 완전한 시원적 상태가 [과연] 존재하기는 했는지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종종 그 영아 상태를 과대평가하며 거기 노스텔지어에 도달했다 가정하는 스스로의 중복 퇴행을 자랑스럽게 자칭하는 반쪽짜리 (도착의) 신비주의자들이 간헐적으로 등장하기는 해도, 그저 이를 증상적으로 참칭하는 (성)도착증자가 아닌 한에야 작금의 우리에겐 흉터(운석)만이 진실이다. 그리고 (시원적 우주가 [전혀] 아닌, 그 우주가 파괴되었다는 증거인 바로) 이 [흉터]는 어떤 종류의 '시간'을 구성하고 있다.

가령, 어떤 이들은 상상 속에서 시간이 병렬적으로 흐른다 주장한다지만, 그들이 제아무리 그리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우선 한 가지 상상이 시작되고 끝난 이후에야 다른 상상을 출발할 수 있다. 그들이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아닌 이들도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같은 시간에 대해 거듭 다시 다른 양상으로 상상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그 상상된 결과를 산출하는 상상하는 작업 자체는 일렬의 시간 한계 내에서 일어난다. 요컨대 한계 지어진 시간을 초월적으로 초과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저 아무나의 상상뿐 아니라 추론 속에서도 발견되는 흔한 포장지뿐인 [평범한] 허울에 불과할 테니. 그러니까, 우리는 공간을 초월해서 달에 가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듯, 지금 컵을 가지러 주방으로 발길을 향하면서 이미 주방에 도착했다면 컵을 집어 들어야지 하고 시뮬레이션하는 추론을 통해 공간을 [무려] 초월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자유로운 상상이라도 우리는 딱 남들이 자유로운 그만치만 자유롭다. 예외는 없다. 그처럼 우리는 남들이 서로서로 다른 딱 그만치만 남과 다르다. 아주 획일적이고 일률적으로, 딱 그만치[만].

그러나 위의 사례와 달리, 최초의 우주를 천 갈래 만 갈래 갈기갈기 때려 부순 예의 운석은 분명 병렬적인 평행우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평행우주의 축에 있는 흉터는, 그게 언젠가 최초의 운석이 만들었던 흉터일지언정, 혹 언젠가 다른 흉터로 바뀌었을지언정 병렬의 시간을 창조해 낸다. 그 언젠가의 시간은 매번 현재와 소통하며 세계를 구성한다. 이른바, 신경증자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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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렬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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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관성을 통해 소통한다. 언어는 각기 단어도 문법도 다르다지만 어떤 일관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동쪽을 보는 채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고개가 향한 방향이 어느 방위인지 알았다면, 서쪽을 보는 채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을 때 고개가 향한 방향이 어느 방위인지 그리 행동하지 않아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일종의 진공상태인 내부 흉터가 자랑스러울 만치 커다란 비극을 가지고 있는 혹자든, 아니면 그다지 큰 흉터가 아닌 다른 이든 간에 그 흉터를 채우는 방식은 아무리 다양해도 어떤 유사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의 슬픔을 알고 있으며 타인의 슬픔 또한 자신의 슬픔으로부터 은유할 수 있다지만, 더욱 나아가 타인의 슬픔의 양상이 우리 자신이 겪었던 그것과 아주 다르더라도 그것을 '슬픔'이라고 부르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감정을 (상상이 아니라) 추론할 수 있다. 기실 소위 [유효한] 공감(교감)은 뭉뚱그린 상상 아닌 추론[만]을 그 매개 삼을 수밖에 없겠으므로.

물론 무수히 다른 흉터를 채우는 방식은, 그리 내면의 밑 빠진 독을 채우는 방식은 모두가 각기 다르겠으나 거기서 어떤 [일관적] 상동성을 발견할 순 있으리라. 마찬가지로 바로 거기서 우리는 [병렬적 시간]을 발견하곤 한다. 깊은 흉터(트라우마)는 당사자를 매번 그 시점으로 소환한다. 그가 극복하지 못한 상황이, 기억이, 그리하여 그 '소리'가, 또 그 '감각'이 예의 모든 감정을 다시 불러내는 단서(방아쇠)가 된다. 그렇게 예의 트라우마(흉터)는 오늘의 그를 그리 그 시점으로 재차 끌어들이고야 만다. 트라우마는 그에게 하염없이 극복을 강제한다. 현재 극복하지 못했다면 극복할 때까지 그는 그 시간을 살게 되는 것일 양이다. 어떤 종류의 지옥처럼,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를 다시 해결하고자 하는 셈일는지. 그리 그는 [영영] 상상하기도, 갈망하기도 한다. 실상 얻고 나면 별것 아니었던 무수히 많은 상품을 욕망했던 건, 사회가 평가하는 그것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그저 흉터가 원했던 까닭이니. 어쩌면 어떤 이는, 그의 흉터가 그것을 [가장] 원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원하는 모든 것을 곧장 모두 가져야 하는 응석(보다 원형의 흉터)의 배설 방식으로 예의 흉터의 일관성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그리하여 오직 흉터[만]이 일렬로 배열된 개인적 시간을 평행우주인 양 재구성한다. 그는 반복해서 욕망한다. 그는 거듭 흉터(가령, 노스텔지어)에 사로잡힌다. 그의 일관된 욕망, 그의 기질은 그가 어떤 흉터를 채우고자 하는지를 매번 명백하게 논증한다. 그처럼 그는 멈춘 시간 속에서 망령이 되어 [영영] 흉터를 떠돈다. 그는 그의 우주에 흉터를 만들어 놓은 운석에 눌린 아래서, 흉터를 채우고자 했던 무수한 시도들을 통해 온갖 다양한 질료들로 예의 흉터를 채우고자 하지만 흉터는 채워지거나 사라질 수 없다. 그의 우주는 흉터 덕분에 점차 다채로워지기는 한다. 그는 흉터 이전을 가정하고, 그렇게 가정된 '자아'의 부족분인 흉터를 [대리 보충]하기 위해 예의 흉터를 온갖 욕망으로 번역하는, 흉터의 가장무도회를 벌이기도 한다. 그 번역의 흔적들이 흉터를 축으로 그의 소위 (딱 남들만큼[만]) [풍성]한 [미학]적 세계를 [갈증] 속에서 [핏발선 눈으로] 구성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흉터는 언제나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흉터가 일구어내는 불균형이야말로 그의 정신이 작동하는 동력인 까닭이다. 거대한 흉터는 소박한 흉터들의 연쇄를 담보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바로 그 흉터 중앙에서 그 자신에게 비로소 폭로하기도 한다. 바로 이 흉터 때문이었다고. 그리하여 '증상'은 전치되기도, 달리 은유 되기도, 그저 겉옷만 바뀌기도 한다. 이를테면, 흉터는 아름다운 외관을 '굳이' 덧입고자 애쓰기도 한다. 종종 노스텔지어 등의 외관을 통해 마치 스스로 흉터가 아닌 양 굴기도 하겠으나, 언제나 늘 그것은 [오직] [흉터]에 불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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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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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트라우마)는 이 흉터를 재해석하는 작금의 자아상과 관련 있다. 자아상이 행복한 인간상이라면 불행한 모든 순간이 그에게 흉터일 수 있지만, 그의 자아상이 비극을 견뎌내는 영웅의 상이라면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던, 그리 다소 행복했던 순간들이 도리어 그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후자의 그가 현재 자랑스럽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자신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불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누구의 불행보다 더 불행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어른스러워야 하는 자아상에 비해 그렇지 못한 언젠가의 말실수가 그에겐 [흉터]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항상 천진난만해야 하는 자아상에겐 언젠가 천진하지 못했던 어느 날이 흉터일 수 있는바. 언젠가 우리는 어떤 증상을 치료(제거)하고자 하는 양의 의도로 자신의 비극을 [선전]하면서도, 그 증상의 부작용에 의존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은밀히 발견하기도 하며, 이 부작용을 지속하기 위해 의식적으로라도 여느 증상들을 [아닌 척] 스스로 악화시키기도 했더랬다.

그와 같이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얼마간 정지된 시간을 산다. 그 누구도 여기 이 정지된 병렬의 시간을 벗어날 순 없다. 실상 벗어났다며 온 힘을 다해 억울한 표정으로 주장한다손 치더라도, 그가 이를 위해 애를 쓰는 그만치나 그의 현재적 트라우마(흉터)는 그야말로 이 정지된 시간을 벗어나지 못한 모든 [순간]들에 오직 고착되어 있으며, 그런 까닭에 그의 자아상 또한 매번 이를 벗어나 초월한 이상에 반사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셈이라. 그는 계속해서 흉터에서 벗어났다는 병렬의 자기 암시에 갇혀 [순간]의 꿈만 꾸며 [지속]하는 [현실]로부터 동일 흉터로 도피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가령 자신이 타인과 다르다거나 보다 어른스러우리라는 자아상이 도리어 그의 트라우마([순간]의 논리)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있을 터다. 어디에 의존하고, 무엇(가령, [지속]하는 [현실])을 외면하고자 환각을 '굳이' 소환하는지 등.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간 추론할 수 있으리라.

그처럼 구조상 흉터 자체를 극복할 순 없는 까닭에, 그가 임의적일지언정 작금의 흉터만이라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흉터를 스스로에게 폭로하여 다른 흉터로 대체하는 것이다. 심연으로 곧장 내려가 직면하는 순간 그 흉터(동력)는 온갖 정신의 다양한 질료로 채워질 방법을 강구할 수 없게 되므로, 그러니까 그 흉터는 그가 직면하고 규명한 원인으로 특정되어 버리므로 더 이상 다면적 정신의 일관적 구조를 지탱하는 동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은 늘 동력을 가져야 하므로, 곧장 다른 흉터로 동력이 교체된다. 고로 누구도 직면한 이후엔 동일 흉터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그 자신이 자기 흉터를 직면해 스스로 성숙하다 [어른스럽게] 주장하는 저 모든 헛바람의 수사들은 오직 [거짓] 교설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천재를 은근히 참칭하며 스스로 시원적 영아 상태를 구현하려고 퇴행을 유발하고자 하는 반쪽짜리 신비주의자(이를테면 무수한 교주 호소인이나 피터팬 또는 선각자 혹은 메시아 호소인)들이 그 대표격인바. 우리가 그저 알 수 있는 건, 그리 무수히 폭로되어 재구성되는 흉터 중 [과연] 어떤 흉터([순간]의 논리)가 과연 우리 자신(의 현실인 [지속]의 삶)에게 더 유효하고 덜 유효한지 정도 아니던가. 그리하여 자아상이 흉터를 기반하여 스스로 대리 보충하는 것처럼 흉터 자체 또한 매번 다른 흉터로 전치되면서 자아상을 대리 보충하는 방식으로, 자아상은 매번 재구성된다. 물론, 흉터 이전에 [완전한] 무엇이 있었으리라는 [허상]이야말로 바로 이 [자아상]이 매번 다시 구성되는 동력으로서 가장 뿌리 깊은 [흉터]인 것이다.

완결은 언제나 [허상]인 까닭에, 자아상은 구성되는 과정으로만 현현할 뿐, 그저 구성이 완결된 도달점으로써 언급되는 최초 혹은 최후의 자아상은 그저 하나의 동력을 추동하는 과녁으로서만 가정되는 [영원한] 재차 [흉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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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계산을 하면서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계산들은 결코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세계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결과 속의 이 불공정, 이 환원 불가능한 비동등이다. 세계는 신이 계산을 하는 동안 '이루어진다.' 만일 이 계산이 맞아떨어진다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질 들뢰즈 / 차이와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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