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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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국가에서도 ‘굳이’ 특정 도시에야 메시아 콤플렉스와 피터 팬 증후군의 중복 소유자들이 바글거리는 까닭은 과연 도대체 무엇일는지.
어쨌거나, 무슨 도로에서 혹자는 다른 차를 추월하겠다는 (욕망조차 되는 데 실패한) ‘욕동’에 힘입어, 상황판단이 아닌 그저 ‘승리’를 위해서만 종종 위험한 추월을 감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저기 저 운전자가 ‘감각하는’ 뒤처진다는 ‘이미지’와 삶 자체가 뒤처진다는 ‘개념’의 [혼미한] 혼동이, 어떤 제사장의 양태들을 연상케 하지 않던가. 말하자면 우리는 의자라는 ‘단어’나 ‘이미지’ 따위에 앉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의자’의 ‘이미지’가 아닌, ‘의자’에 비로소 앉을 수 있다. 허나, 마치 산을 좋아하는 자들의 기질이 산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억지 규격이 자연스러움을 참칭하고자 하는 양. 또 마치 양반은 양반다워야 하고 노비는 노비다워야 한다는 조선시대 흔하디흔한 여느 변명들이, 그렇게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미개한 권력의지로 번역되어 그리도 [자연스러움]을 참칭하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 남는 필연적이고 자연적 사실은 그들의 [미발달]된 [주도권]에의 권력의지라는 욕동이, 그리 자연을 아무 때나 참칭하는 바람에 자연과 문명을 구분치 못하게 된, 그리 필연과 상상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퇴행적 욕동이 그들을 작동하게 한다는 사실뿐이다.
다시, 마치 산을 좋아하는 자들의 기질이 산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억지 규격이 자연스러움을 참칭하고자 하는 양. 땅을 좋아하는 이의 기질이 ‘대지’의 물리적 특성을 닮았다는 헛소리는, 여느 주도권에 혈안이 되어 혹세무민을 일삼는 점쟁이의 그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점괘라는 피상적 이미지로 운명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동일시하며 상대해 보겠다는 얼빠진 시도는, 기실 ‘운명’이라는 개념에 대항하여 이미 자동으로 퇴행하여 ‘열등감’ 가득한 일종의 ‘주도권’이라는 [허상]을 희구하는 낡은 양태인 모양이다.
삶이라는 우주 앞에서 우리는 의지를 가질 순 있으나, 그나마의 모든 ‘주도권’ 따위는 모조리 허상이라는 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무슨 나약한 ‘선민의식’의 탄생이, 그처럼 일종의 ‘자랑스러운’ 자칭 [사명]의 탄생이 말하곤 하는 ‘비겁’이 그리 무수히도 배설되며 발설되곤 하지 않던가. 이 적나라한 결핍은, 그러니까, 이 나약한 의식은 무수한 객들 또한 저와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을 거란 망상 아래 더 무수한 저 퇴행적 ‘기싸움’을 시도하지 않더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들과 마주할 적마다 저와 같은 진흙탕 싸움에 임해야 하며, 끝내 하나하나 모조리 개념화하여, 이를 다시 여느 혹자가 시도할지언정 모두가 그 수법을 낱낱이 알고 있도록 [미리] [모조리] [체계]적으로 폭로해 놓아야 할 터다. 상담소나 병원이 아니고서야, 사회에서 이 퇴행적인 무한한 기싸움을 끝내고 다만 할 일을 하려면, 예의 기싸움을 한자 한자 개념화하고 해석하여 대응하며 폭로할 밖에 달리 방도가 없을 테니. 이는, 특히 정신의 영역에선 치료받고자 하는 의지부터가 없으면 치료가 어려운 덕택인바. 저 자아도취라는 증상이 이토록 범람하는 폐단의 원인이 그와 같을 텐데. 그리 증상에 덧붙어야 할 대응의 매뉴얼은 예의 증상과 아울러 [영영] 누적되고 갱신되어야 할 [운명]인가 보다.
유년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으로서 현실 인식이 진작 휘발시켜야 했을 비대한 자아의 거품이 여즉 남아있는 이유는, 그 자신의 그토록 오래된 변론마냥 스스로 영영 천진해야 할 ‘피터 팬’의 사명을 타고난 까닭인가. 또한 그는 스스로의 알량한 호소처럼, 동일한 ‘피터 팬’들을 ‘굳이’ 구원할 [사명]을 타고난 ‘메시아’인가. 이 영원한 기싸움을 유발하여 언제고 다시 ‘주인공’의 소꿉놀이를 시작하려는 정신세계의 특징으로는, 아무래도 ‘의도’를 지레짐작하는 양태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을 모양이다.
그처럼 신의 ‘의도’를 예측하여 신의 ‘주도권’을 참칭하거나, 상대의 의도를 선점했다고 ‘주장’하며 [독심술]이라는 [상상]을 기반으로 ‘주도적’ 조언을 지껄이며 [통찰력]이라는 흐지부지한 간판을 [다수]에게 (인과관계 없이) [호소]하거나, 학술을 참칭하며 여타 학자의 ‘의도’를 논증 없이 지레짐작하며 ‘주도권’을 참칭하는 등의 헛된 망상의 [배설]은, 모든 이들이 저와 같이 ‘주도권’을 미리 희구하는 판 위에 있으리라는 ‘증상(동일시)’의 [악화] 과정이 아니던가. 이는 그저 다음 발달 단계의 상태를 모르는 채 지금이 전부인 줄 아는 까닭에 자행되는 무대 아니던가 말이다(마치 스스로 현명하고 교활하다 자인하는 반려동물처럼).
그럼에도 ‘의도’는 ‘논증’될 수 없다. ‘의도’에의 짐작은, 가령 범죄자 따위가 범죄로서 곧장 증명할 [범죄의 패턴]을 다룰 적에, 이 또한 함정 수사 없이 다루어져야만 하는 미묘하고도 단기적인 추정 아래 있는 여느 짤막한 기법의 일부로써의 연명의 한 종류 정도일 뿐이다. 예컨대, 이런 범죄자로 말하자면, 저 알량하디알량한 기싸움(반려동물들이 종종 일으키고자 하는 서열 싸움)의 구조는 범죄자가 다른 모든 이들을 예비 범죄자로 가정하는 동시에 준법 중인 타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걸 두려워할 만치 나약하다고 생각해야만 스스로의 자아가 상처 입지 않으며, 나아가 정당화까지도 될 수 있으리라는 양비론적 사고방식과 유사한 정신 구조물의 한곗값일 양이다.
여느 범죄자는 종종 범죄 없이 준법 속에서 경쟁할 자신도 의지도 없을 만치 나약한 나머지, 따라서 기본적인 [인내심]의 부재 덕택에 다급히 범죄(예컨대 논의는커녕 논쟁조차 자신이 없으나 [독재 놀이]는 하고자 이기고는 싶어 다급히 선포하는 역사 속 무수한 늙은 응석받이들의 띨띨한 억지 계엄들처럼)라는 지름길을 택했음에도, 그로 인한 [열등감]을 애써 메우기 위하여, 그렇게 지난한 합법적 고민(논의)에서 스스로 탈락하여 추방되었다는 생각을 지우기 위하여 스스로 법 위에 있다는 선민의식(신성)을 그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급조하곤 하지 않던가. 그러나 저지른 불법을 들키지 않거나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 자신하기 이전에, 애초에 그 자신의 [상상]처럼 뛰어난 선민(신성)이라면 법을 지키면서도 [평상적인 인과관계]를 통해서조차 그 모든 욕망을 채우고 [설명]할 수 있었을 테니. 법 위에 있어 지키지 않아도 된다 자인하는 알량하고 경솔하며 인내심 없는 권력의 계승으로 색조된 멍청한 범죄자로서의 권력자들의 배설 양태는, 얼빠진 조작 실패로 오류를 뱉는 컴퓨터의 블루스크린 앞에서 기계를 이겼다며 더욱 의기양양해지는 서투른 사용자의 흉물스런 꼴불견과 유사하지 않겠는지.
이런 망상적 주도권의 양태는 너무도 다양할 텐데. 마치 더 나은 직장 생활이, 더 나은 연애가, 더 나은 관계 양상이 늘상 존재하는 동시에 그걸 저만 안다는 양, 그리하여 그것이 오직 상대를 자신에게 묶어놓는 수많은 기술(결핍과 증상의 [배설]과 [기획투사])들을 통해 달성된다는 듯 서술되나, 기실 이 기술이라는 명칭 너머엔 수많은 그저 [착취]의 패턴 따위들이 즐비하게 등장하고 있지 않나. 이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추론(공감)하지 못하는 발달의 실패와 아울러, 추론에 쏟아야 했을 정신의 여력이 피상적 양상에 배분된 결과가 아니던가(그렇게 반려동물들은 한 치 앞의 자기애적 자랑스러움만 고려한 자기 자신의 현명하고 어른스러운 교활함에 더욱 의기양양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처럼 실패한 발달로 인해, 또 이 승패에 혈안이 된 지옥(가령, 결코 무슨 상황에서도 [호구]가 되면 안 된다는 맹목적 정언명령처럼)에 온갖 관객들을 플레이어로 끌어들이고자 더 나은 관계에의 조언들이 그리 다급하게 지껄여지곤 하지 않던가(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호구]여서는 안된다’는 괴랄하고 실체 없는 강박을 그토록 흉물스럽게 가지고 살아야 하나? 말하자면, 때때로 호구가 되면 어째서 안 되는가? 요컨대 그게 기분의 문제라면, 왜 자꾸 배설하며 전염시켜 옆 사람에게 그가 느끼지도 않던 기분을 강요하는지). 알량한 주도권과 상상된 피해의식이 나약한 착취의 기술(예컨대 할 일을 피하거나 가족이나 연인, 지인을 등쳐먹으면서도 어른스러운 체면을 유지하는 반려동물이 되는 기법 등으로 구성된)들을 그토록 방어적으로 다급히 생산하고들 있으니.
허나, [충성과 처벌의 전제군주 놀이나 교주 놀이]가 아닌 한에야 관계는 (그게 설령 가족이더라도) 쌍방의 합의에 의존해야 서로 간의 무례를 예방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예방해야 할 텐데. 끝내 이 ‘주도권’은 일종의 무례를 한 방향으로만 허용받고자 하는 퇴행적 권력 의지에 다름 아니지 않나. 모든 관계가 언제나 ‘상호 간에’ 오직 ‘단절’ 가능해야만 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단기적 권력의지라는 <주도권의 배설과 무례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로소 천륜에의 절단조차 그 선택안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할 테니(어쩌면 사회 안전망이라는 복지는, 바로 이 선택안의 유효성으로 병리적이지 않은 관계를 (친족관계 내에서까지도 부양 없이) 작동하게 하기 위해 그 의의가 있을는지도)>.
그러나 도무지 그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건, 그리하여 그 누가 무슨 방식으로 (가령, 어른스럽게) 사실을 호도하건, <무슨 특이한, 위대한, 독특한, 다양한 사람이 뭐라 말하건, <우선> 1+1은 2다>. 논증에는, 어쨌거나 아무런 의도도 주도권도 작용할 수 없다. 돌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에도 마찬가지로 무슨 의도도 주도권도 관련 없을 수밖에 없다(가령 [의인화]는 [동일시]의 친척에 불과하겠으니).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피터 팬 증후군임과 동시에 메시아 콤플렉스일지언정, 그것과 주도권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주도권과 마찬가지로 메시아로서의 [사명] 따위는 그저 과대망상(허상)에 불과하겠으니. 만에 하나 예의 [사명]이 작동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지와 개념 사이에서 ‘스스로 위로’하고 추동하려는 [임시] 동력으로서 작위적인 한계 내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이는, 동력의 주체인 그 자신이야말로 그것이 다만 동력을 위한 허상임을 누구보다 아는 상태로[만] 활용되(어야 하)는 동력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조금의 ‘선민’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그 반대일 수[만]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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