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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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부하테스트 상황과 같이 서버에 트래픽이 급격하게 몰리면 서비스 구조 내부 어디에 병목이 있는지 찾아낼 수 있다. 특정 서비스에 트래픽이 몰려있다면, 해당 서비스를 별도로 분리하여 여럿으로 복제해 구동 후 그 앞에 트래픽을 분산하는 또 다른 서비스(이를테면 로드밸런서)를 설치하기도 한다. 또, 그 서비스가 만일 매번 해야 하는 연산이 아니라면 캐시cache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돌아올 값을 메모리에 저장해두고 해당 서비스를 통한 연산 없이 값을 반환하는 전략으로서, 아직까지 저장되지 않은 연산일 때만 해당 서비스로 트래픽을 전달해 연산을 수행한다.
메모리에 연산의 결과를 저장해두고, 동일한 연산이라면 연산을 수행하지 않고 결과만 바로 반환하는 캐시cache 전략은, 당연하게도 메모리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식의 전략에서는 연산(CPU)과 메모리 간 비중 조율이 서비스의 성능을 결정짓는 셈이다. 제아무리 소프트웨어의 바탕인 하드웨어의 성능이 좋더라도, 예의 조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서비스는 제대로 된 성능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미리 저장을 해 두어서 연산을 거치지 않고 곧장 반환하는 프로세스는 우리 정신에도 마찬가지로 자리한다. 이른바, ‘고정관념’이 그 쉬운 예가 아니던가. 우리는 매번 모든 일을 연산할 수 없다. 가본 길을 갈 때, 매번 어느 길로 갈지 추리하는 게 아니라 이전에 갔던 길을 ‘기억’해 내는 셈이겠으므로. 가던 길이 아니거나 길이 많이 바뀐 동네를 걸을 적 우리는 다시 한번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우리 주의력을 길 위에 풀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흔히 이야기하는 ‘연역’은 예의 연산에 가깝고 ‘귀납’은 메모리에 가까운 프로세스 아니던가. 허나 우리가 연역할 적에도 바로 이어가던 직전 연산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5+5=10을 연산할 적에 +에까지 다다르면 5를 기억하고 있어야 할 테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경우의 수를 모두 기억(메모리)에 올려놓고 마지막에 그 공통 패턴을 추출하는 귀납에서도, 어쨌든 마지막에 가서는 ‘연산’해야 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사고가 연역하든 귀납하든, 우리가 무언가 의사결정을 할 적에 연산과 기억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어떤 연산은 기억에 토대를 둔다(종종 이를 숙련이라고 하지 않던가). 연주자의 주의가 피아노 건반을 매번 확인하기보다, 음표에 머물러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어느 순간 연주자의 주의는 곡 전체의 분위기나 애드리브에 머물러야 할 적도 있으리라.
따라서 우리가 의사결정할 적에 ‘사고’를 하기보다 캐시(‘기억’)에 의존하는 게 종종 편하긴 하다. 말하자면 ‘고정관념’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상황(트리거)에서 같은 고정관념을 반환할 순 없겠으나, 그조차 의사결정의 영역이므로, 요는 ‘얼마나’ 다르냐다. 만약 누군가 사고가 필요한 의사결정에서, 해당 사고에 필요한 의식의 비용보다, 다르지만 비교적 유사한 기억에서 곧장 결론을 반환하는 의식의 비용이 저렴하므로 그걸 반환해야 한다는 고차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곧장 그리 캐시cache된 (오)답을 도출할 것이다.
사고에 필요한 비용이 사고를 할수록 숙달되어 낮아진다면 그 역도 성립할 것이다. 기능이 떨어지면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고, 그는 그럴수록 자기 과거의 의사결정을 참조하기만 할 모양인데. 이처럼 사고(연산)에의 회피가 고착되면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고보다 결론이 먼저 있는 것이다. 서버가 내려가 고장 났으나 캐시cache 때문에 일시적으로 멀쩡한 양 보이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하던지. 이른바 동어반복의 패턴에서 당사자는 미리 결론을 두곤 그렇지 않은 양, 마치 ‘사고’하는 양 말이나 저술을 이어가는 것이다. 허나 이 프로세스는 ‘사고’가 아니므로 연역도 귀납도 될 수 없다. 다만 과거 자신을 영원히 참조하는 현재 자신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가 의존하는 유일한 닻은 ‘과거의 자신’이라는 ‘자아’고, 더 정확히는 자신의 과거 의사결정‘들’이라는 기억의 더미다. 고로 그는 <스스로 무슨 말을 뱉었든, 자신이 뱉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그것이 옳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보면, 소위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 모음에 불과할 텐데. 그러니까 자기 참조 기억으로서, 생의 초기엔 일종의 <습관>으로서의 자주 참조되던 임시 기억이었을지언정, 언젠가 <자기>라는 구분과 함께 비대하게 누적되어 일종의 재귀함수로 저장된 덩어리일 터다. 다시 사고하기가 싫어, 과거 자신의 유사한 상황에서의 의사결정에 작금의 사고를 의탁하는 <동어반복>은 우리를 일종의 <자동기계>로 만들기도 한다. 물론 동일한 결론을 계속해서 뱉어내는 이 <기계>는 언젠가 끝끝내 반복되는 패턴 <바깥>을 마주해 <오류>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사유(사고)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혹자의 말이 성립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또 어떤 문맥에서 <바깥>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함의가 <절대적 현실>, 그러니까 <다다를 수 없는 실재>로 <사용>되는 까닭이 저와 같다.
혹자가 오직 동어반복의 기계로서만 삶을 꾸려나간다면, 어쩌면 그 도피적 삶이 평안하게 느껴지는 착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스스로 사회를 좀 아는 어른 정도로 으스댈 장소를 찾아다니며 그리 으스댈 수도 있으리라. 자기만의 고뇌에 빠진 척 심각한 표정과 깨달은 표정을 번갈아 연출하며, 결론을 미리 정해둔 채 스스로 작성한 동어반복의 논문 사진을 <자칭> 라이벌(숙적)에게 보여주면서 어른스러운 문체로 떼를 쓰는 식으로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삶의 유속은 그처럼 안정적일 수가 없다. <동어반복의 기계>로 남기 위해 이 악물고 모르는 체하는 게 아니라면, 세계에서 변치 않는 건 변화한다는 바로 그 사실 뿐인 것이다. 삶은 변하고, 우리 정신은 늘 그 변화와 마주하는 데까지 <반드시> 내몰린다. 도무지 그 어떤 기억으로 퉁 치려 해도 끝내 사고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강제로 내몰리곤 한다. 요컨대 사유(사고)는 폭력인 것이다.
변하는 삶(자아나 본질 바깥으로서의 삶/현실)은 우리에게 해본 적 없는 의사결정을 종용하고야 만다. 거기서 우리는 소위 <딜레마>에 처하는 것이다. 예의 소프트웨어에선 부하테스트 시 어떤 서비스에 병목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우리 정신은 동어반복으로 도저히 퉁 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시 여태 무얼 고민하지 않았는지 또 무엇이 더 필수적인지 강제로 사고(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 강제된 딜레마가 딜레마인 이유는, 그동안 자랑스럽게 쌓아 둔 비대한 <자아(본질)>를 사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그는 <자아(본질)>의 죽음을 경험할 양인바. 정신적 <발달> 과정 안에 일종의 <폭력>으로서 상징적 <죽음>이 내포되는 까닭이 저와 같다. <사고하기>에 다다르고자 하는 <발달>의 과정에서, 그러니까, <사고는 그 자체로 자아의 죽음인 까닭에 폭력인 것이다>. 감내해야 할, <발달 과정으로서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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