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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파열의 논리

영화 ‘부고니아’ 리뷰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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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차

0_목차
1_진실이기를 원함
2_타임 패러독스
3_스스로 존재하기로 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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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실이기를 원함

앞을 보고 걷느라 아래를 미처 보지 못해 한 칸 아래의 계단을 밟은 적이 있다. 평지로부터 쑥 꺼지는 느낌은, 땅이 아래에 있다는 진실과 땅이 그대로 이어질 거라는 예상의 괴리에 다름 아니겠으니. 바로 그 예상은 깨어지고 나서나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라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어쩌면 일종의 타성일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예상한다. 어쩌면 내일 해가 뜨지 않으므로 해서 얼마나 일출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깨달을 수도 있으리라.

요는, ‘진실’과 ‘진실임직함’의 관계가 아니던가. 무언가 인식할 적에 우리는 다량의 사례로부터 원리를 귀납하지만, 그런 일차적인 귀납에 ‘연역’을 더해야 계속해서 다음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연역’에서 우리는 가설을 설정한다. 이 가설은 반증으로 깨어지며, 만일 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증명을 이어 나간다면 언젠가 그것은 ‘이론’의 영역을 넘어 ‘법칙’이 될 수도 있으리라. ‘진실임직함’에서 ‘진실’을 기어이 찾아 나서는 행위는 우리 일상이라는 현실이자 진실을 구성한다.

첫 등교 날 학교로 가는 길은 학교라는 도달점에 도달할 수 없는 길들 사이에 있다. 어쩌면 먼 길을 돌아서 갈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목적지를 두고 길을 찾을 때조차 우리 인식은 ‘진실’과 ‘진실임직함’ 사이에서 ‘진실’을 구분해 내고자 한다.

예상에서 빗나간 현실 위에서 우리는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우리 정신의 관성도 마주하지만, 기실 ‘진실’을 <추론>하고자 노력했다는 정신의 일관성 또한 마주했을 터다. 그리고 그 ‘추론’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릴’ 수 있고, 바로 그렇게 틀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추론’이 또한 샘솟는다. 자, 바로 이 ‘진실임직함’은 무엇 때문에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는가 하고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저기 저 ‘진실임직함’이 ‘추론’의 영역에 있을 땐 분명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의 영역으로 가면 다른 일이 벌어진다. 추론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상상’은 화자가 도무지 원하지 않을 수 없는 ‘욕동’에 기인하지 않던가. 그는 스스로 ‘주인공’이길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곤, 아아, 나의 ‘진실임직함’은 ‘진실’에 다다르지 못했구나, 하고 자성하며 추론을 다시 하는가?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고 조악하게 현실을 도피하지 않던가. 그가 ‘주인공’인 삶은 과연 현실(진실)을 추론하던 와중의 가설이었던가? 그럴 리 없다. 그가 도달한, 추론 아닌 상상에의 사다리는 ‘진실임직함’이 아니라 ‘진실이기를 원함’을 거치하고 있다. 일종의 소원 성취로서의 가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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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임 패러독스

시간여행에는 일종의 역설(패러독스)이 있다. 그가 누군가를 살리고자 과거로 갔다면, 그가 과거로 간 인과적 이유는 그 누군가의 ‘죽음’ 때문인 것이다. 그가 그 누군가를 살리면, 그 자신이 과거로 돌아올 이유가 사라진다. 그는 애초에 돌아오지 않았어야 할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간단한 도식을 ‘욕동’에 기입할 수도 있으리라. 현실(진실)도피를 위한 욕동은 결핍 때문에 일어난다. 그 자신의 욕동의 대상이 현실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상이 왜 이상인가. 현실이 아닌 까닭이다. 그가 ‘진실임직함’ 속에서 ‘진실’을 추론하는 게 아닌, ‘진실이기를 원함’에서 ‘진실’을 배제하려 하는 순간, 그는 바로 이 역설에 빠진다. 그가 그토록 ‘주인공’이기를 바라는 바로 그 이유는,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이 바라봤을 적 결코 스스로 주인공이 아닌 까닭이겠으므로, 도무지 이 타임 패러독스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그의 ‘진실이기를 원함’이, 그의 ‘욕동’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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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스로 존재하기로 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자

역설은 법칙과 법칙의 충돌이겠으므로, 그는 이제 이 혼란한 와중에 새로운 법칙을 만들고자 한다. 왜 아니겠는가? 따라서 여기 작동하는 상상은, 추론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진실임직함’에서 ‘추론’은 이미 존재하는 필연성에서 연역을 시작하고, 증명에 실패할 경우 가설을 되돌려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진실이기를 원함’에서 ‘상상’은 필연성을 선언하고, 증명에 실패할 경우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으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 ‘진실임직함’에서 ‘추론’은 이미 있는 필연성을 사용한다면, ‘진실이기를 원함’에서 ‘상상’은 스스로 원하는 필연성을 아무렇게나 선언하다 그 필연성들끼리 충돌(자멸)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설정 충돌은 해리를 낳는다. 잊고자 하는 것이다. 스스로 수행한 자기소개를 부정하고, 그런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바로 그런 적 없는 사실을 저들이 주장하고 있다는 이 명제를 스스로 ‘주인공’이기 위한 상황에 편입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 혹자의 박해를 애써 설정하면서 도피는 때로 ‘순교’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순교한다고 거짓이 진실이 될 리는 없다.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지껄인다고 해서, 그 내용이 어른스러워지지 않는다. 진실인지의 여부는 언제나 별도의 검증을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기실 그가 ‘주인공’인지의 여부는 ‘진실’의 여부와 <아예>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인공이든가, 말든가.

바로 그런 까닭에, 그러니까 설정(필연성에의 선언)의 남발이 여기서도 작동하는바, 예의 설정 충돌은 새로운 설정, 그러니까 설정 충돌에 대한 설정을 낳는다. 그의 선언에 따르면, 이제부터 진실 여부는 그가 주인공인지의 여부와 상관이 있어지는 것이다. 이제부터 무려 천진난만하여 순수하게 말하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어른스럽게 말하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아름다운 문체로 말하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미학과 철학은 혼동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철학과 예술은 혼동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정의로운 혁명가가 곧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 자신이 주인공이 위해 거대한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는 ‘자본가’의 적이며, ‘공산당’의 적이며, ‘우파’의 적이며, ‘좌파’의 적이며, ‘카르텔’의 적이며, ‘종교’의 적이고, ‘악습’의 적이고, ‘부정과 부패’의 적이고, 저 모든 거악의 적이자 인류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악의적인 무려 외계인의 대적인 것이다. 그는 모든 나쁜 것의 적(맴매하는 자)이자 모든 좋은 것의 동료(우쭈쭈/동일시/이입)인 것이다(예컨대, 투사와 내사).

비로소 그는 철학자이자 혁명가이자 예술가이자 구원자(메시아)이고, 선각자이자 구루이며, 영웅이자 첩보원인 동시에 성자이자 신으로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으스대는 것이다. 기실 이 모든 ‘상상’은 <보다 격렬하게 으스대기 위함> 아니던가.

이렇게 탄생한, 그리고 그토록 자주 무수히도 발견되는 저 흉흉하고 끔찍한 혼종은, 예의 설정 충돌을 감당하지 못하여 스스로 예의 설정 충돌에 대한 재차 설정을 만들기 시작하기 위해 스스로 박차를 가하며 탄생하고야 마는 것이다(‘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뛰어넘는, ‘스스로 존재하기로 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자’랄까). 저 설정 충돌 이후 이야기는 그 자신의 욕동에 의해, 그러나 처음 정리된 욕동이 아니라 파열 이후 되는대로의 욕동에 의해, 그러니까, 그저 단기적이고 자극적인 ‘승리’를 위해 게걸스럽게 조합되어 뿌려지는바.

직전까지 겨우 겨우 유지되던 얇은 균형은, 그러니까 그리 타인을 설득하려는 설득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던 검열(이른바 제정신)은 이 파열의 순간 사라지고, 그는 자기만의 자전거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외부의 어떤 소리(가령 기존에의 필연성들)도 들리지 않고 또 안 들리고자 하는 채. 저 자전거 위엔 이제 이전의 라디오조차 없을 양으로, 그는 자신의 설정(예컨대 자족에의 망상 등)을 위하여 마침내 ‘영웅’이 될 뿐만 아니라 ‘순교’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착>과 <분열>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통일과 완성의 순간, 그는 진정 ‘스스로 존재하기로 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자’의 꼴을 하고 있지 아니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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