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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동일자의 논리

영화 ‘부고니아’ 리뷰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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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Projection 기제는 소위 ‘자아상’을 전제로 한 연약한 자기방어의 수단이겠지만, 소위 그 ‘연약함’이 흔히 이야기하는 ‘자아’의 작동 체계에 동일 강도로 일괄 등록되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른바, 이 연약함은, 자아상이라고 하는 층위에 대비해서 현실의 자기 모습이 얼마나 이탈되어 있는지를 견디는 능력에 대한 연약함인 바다.

가령 그 자신이 어른스럽다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을 ‘어른’으로 대접해 주는 사람만 만나면서 자기 ‘자아상’을 강화할 텐데. 그저 도전 없이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는 이를 찾아 나서면서, 거꾸로 의존할 대상을 찾아다니며 그 대상이 어른이라 모든 게 능숙할 거라 자기 암시를 걸며 이를 전제로 존경할 뿐 아니라 바로 그 ‘존경’에 비롯된 ‘동일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자아상’을 가진 이들과 얼마나 아귀가 잘 맞겠는지. 이처럼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최소 두 가지 종류의 퍼즐은 상호 간의 ‘자아상’들을 강화하면서 ‘연대’하여 ‘무리’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밀집한 ‘자아상’들의 ‘더미’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아상을 의심하게 하는 ‘사건’이나 ‘사물’, 혹은 ‘인물’을 기피하지 않겠는지. 그리고 그렇게 기피하는 이유를 우선 간단하게는 다음 명제가 진술할 수도 있으리라. <나의 ‘자아상’을 위협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아상’이 자신만의 ‘진실’이기를 바라겠으니, 명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나의 ‘진실’을 위협하기 때문이다>라고. 바로 이 대목에서 명제는 한 번 더 번역될 여지를 남긴다. 자기 명제를 소급 적용하기 위해, 결론을 전제로 원인을 거꾸로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의 명제에서 언급되는 <‘진실’을 위협>하는 건 무엇인가? 물론 여기 ‘자아상’의 논리의 전제에는 항상 ‘자기애’가 있다. 자기 자신은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이 ‘자기애’가 언제나 진실을 비껴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합리화’의 전제가 아니던가. 고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진실’이 ‘진실’ 자신을 위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마치 ‘자기애’를 지닐 수밖에 없는 ‘당연한’ ‘자아’가 그 자체로 자신인 ‘자아’를 위협할 순 없는 바와 같다. 그래서 그들은 영영 작동 자체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진실’을 위협>하는 것, 그것은 <거짓>이다.

이 익숙한 도미노는 ‘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자아상’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진실이 ‘자아상’과 동격이 되는 순간, ‘거짓’은 바로 그런 자신의 ‘자아상’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이 된다. 바로 거기서 삭제되는 대상은, 자기 자아상을 의심하는 상태 자체다. 물론 그들의 ‘자아상’이 ‘합리적 이성’을 포함하기 위해, 짐짓 저기 저 ‘자아상’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태’들을 무한히 전시하여 마치 ‘자아상’을 의심하는 모양으로 ‘선전’하기도 하겠으나. 저기 저 ‘자아상’의 고착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심’이 오직 그들의 ‘자아상’을 한껏 빗나가고 있는지만 살피면 될 일 아니겠나. 그래서 명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그가 자기 ‘자아상’을 위협하는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기피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나의 ’진실’을 위협하는 ‘거짓’이기 때문이다>라고. 요는 이 결론이 사고 전개 전에 선수를 쳐서 등록된다는 점이다.

결론이 정해진 토론은 토론이라고 불릴 수 없듯, 결론이 정해진 정신 작용은 ‘사고’이기보다 ‘합리화’에 다름 아니다. 원하는 결론을 이어 붙이기 위해, 그 결론을 떠받치는 근거만 찾아 짜깁기만 하는 양태로서.

그러므로, 저 명제의 화자에게 토론이나 사고의 과정은 주의 대상이 아닐 터다. 자기 ‘자아상’ 바깥에 있으면 곧 그것은 ‘진실’ 바깥에 있는 것이겠으므로 어떤 ‘내용’이든 <무조건> ‘거짓’인 셈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그 논증의 전개 과정에 대한 엄밀성이 아니니까. 그에게 이미 정해진 결론을 향한 전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겠으므로, 그 중간에 모순이 있더라도 어느 날 다른 누군가는 모순이 아닌 적합하고 적절한 논증 과정을 찾아낼 것이니까, 그들의 화두는 그 결론으로 가기 위한 ‘엄밀성’이 아니라 참(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이다. 요는 <누가> 그렇게 판단했는가? 하는 고로, 내용에 대한 ‘엄밀성’과 같은 골치 아픈 ‘사고’는 떠나보내고 <자격>과 <윤리>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명제는 한 번 더 번역할 수 있겠다. 그가 그의 ‘자아상’을 위협하는 것들을 기피하는 까닭은 다음의 명제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자기 ‘자아상’을 의심하게 할 수도 있을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기피하는 것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다> 혹은 <자격 없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거짓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나, 윤리와 진실(거짓)이 무슨 상관인가? 나아가, 자격과 진실(거짓)이 무슨 상관인가? 1에 1을 더하면 2라는 진실이 상황마다 바뀌고 발화자마다 바뀌며 자격에 따라 바뀌는가? 그토록 변한다면 이미 그건 <진실>도 <필연성>도 아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흔한 사례에서 저기 저 <윤리>와 <자격>의 문제가 병합될 수도 있으리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는 저 익숙하고 시끄러운 문장에서 발각되는 것은 <인간>이 곧 ‘윤리’적 존재라는 자아상 위에서의 자의적인 판단에 더하여, <인간>이라는 자격이 자기 자신의 ‘자아상’이 발급하는 자격증의 일환인 양 전개되는 합리화의 양태다. 이 대목에서 그의 ‘자아상’은 <인간>이라는 자격증을 발급하는 <보편적인 공공기관>으로 격상된다. 그리고 그 공공기관은 <상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아무도 부여해 준 적 없는 <일반의지>를 무려 <대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의 명제는 다시 한번 더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 ‘자아상’을 의심하게 할 수도 있을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기피하는 것은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리고 이 맥락 위에서 예의 명제는 다음 명제와 의미론적으로 같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처음 명제에 따르면, ‘자아상’을 의심하게 하는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기피하는 까닭은 <나의 ‘자아상’을 위협>하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까닭은 그 ‘사건’이나 ‘사물’, ‘인물’이 (진정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고,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며, <상식>에 반하기 때문이게 된다.

기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되어야 한다>가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슬쩍 바뀌는데, <인간>의 어감이 <사람>의 어감보다 더 적대적으로 사용되는 이유는 그것이 ‘개념’을 확정하는 느낌이, 그러니까 ‘공적’ 느낌이 들어서가 아니던가. <사람>이라는 단어는 <인간>이라는 단어보다 덜 딱딱하고 친근하여 마케팅 요소로 사용되는 셈이다. 물론 이처럼 단어를 더 친근하게 ‘사’적으로 유용하는 <마케팅>을 일각에선 <문학>이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아무 데서나 ‘공’과 ‘사’를 구분한 후, ‘사’적 영역에 대한 <자격>을 들먹이며 언급을 틀어막고자 떼를 쓰는 익숙한 ‘투사Projection’의 패턴은, 여태 언급한 동일한 방식의 별개의 과정으로 다룰 수 있을 저 <윤리>와 <상식>과 <자격>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증상의 얼굴 아니겠나.

소위 투사가 가져오는 연쇄적인 부작용들은 이 외에도 많을 텐데. 예컨대 그는 자기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기 직전에 재빨리 선수를 치는 것이다. ‘상대’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확신하는 식으로. 예컨대 자기 자신이 추상적인 낱말로 중언부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기 직전에 재빨리 선수를 치는 것이다. ‘상대’가 중언부언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식으로. 그처럼, ‘투사’로 시작된 이 중언부언은 일종의 흔한 모순에 도달하기도 한다. 가령,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는 ‘언어’를 그 산출물로 내뱉으면서 바로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을 다시 논하는, 그리하여 ‘엘리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의 ‘엘리트주의’를 다시 산출하는 경우를 어찌나 많이, 그리고 자주 목도하고는 하는가.

그처럼 ‘자아상’들이 서로를 부양해 주는 저 ‘더미’들 속에서 <비대해진 자아>는 <인간>, <상식>, <윤리>에 대한 <자격>에의 증명서, 그러니까 <자격증>을 발급하기 시작한다. 그 자격증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며, 그 순간 그는 아무도 부여해 준 적 없는 보편의 일반의지를 대표하기 시작하는 셈이고.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자격증>일 뿐 아니라, <윤리>에 대한, <상식>에 대한 <자격증>이기도 한데, 기실 그것은 사실 그 자신의 ‘자아상’과 동일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자격증>일 뿐이다. 그러니까 상대가 나와 같은 <동일자>라는, 위협적인 <타자>가 아닌 <동일자>라는 그런 ‘연약한’ 자격증 말이다.

그저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 과정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는 진정한 <인간>이라 곧 진정한 <인격>인 고로, <상식>과 <윤리>를 갖춘 그러한 <사람>다운 <사람>인 것이다. 이 순간 그에게 “과정”에 대한 “엄밀성”은 마치 <사람>을 <인간>이라 부르는 양, 정 없고 냉담한 <비본질>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타인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자신의 사고 “과정”을 아울러 들여다봐야 하는 폭력에 그가 직면해야 할 수도 있는 까닭에, 어서 빨리 선수를 쳐서 그것을 비하하며 “투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게 그 자신의 <자아상>을 들여다보게 종용하는 건 그 자신의 “자아상”을 “의심”하게 할 수도 있게 하는 일이며, 그가 그 “의심”을 기피하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이 <상식>과 <윤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인간성>에 반하며 <사람> 같지도 않은 일이라 믿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모두가 인간인데 왜 <인간>에 대한 자격, 그러니까 <인격>에 대한 자격을 발급하고 싶어 할까? 기실 그 또한 그것이 “엄밀성”과 상관없이, 소위 <당연함>에 기댈 수 있기 때문일 터다. 심지어 <증명>할 필요 없이 그냥 주장하기만 하면 되니까(이것이 입맛대로 <문학>을 가장하는 <유사 철학>의 익숙한 증명 과정 아니겠나). 조선시대의 논리로 치자면, “지아비”는 “지아비”다워야 하며, “양반”은 “양반”다워야 하고, “노비”는 오직 “노비”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상”의 죄를 짓는 것이다. 이 강상의 죄는 논증에 기반하는가? 그럴 리가. 그것은 인간의 태생에 가정되는 일종의 <본질>에 기반한다. 즉, 너의 ‘본질’은 노비인데 어째서 아닌 척을 하느냐, 곤장을 받아라, 얍!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자격>을 자신이 판별할 수 있는 심리적 자리로 자기도 모르게 올라선 후에 우선 결론 내리고는 바로 이 <자격증>을 발급하기 시작하는 건, <인간>의 <본질>을 자신이 알고 있고 또 ‘거의’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믿는 까닭일 텐데. 바로 그런 까닭으로 그는 자의적인 판단에 의거해, 아무도 부여해 주지 않은 <일반 의지>를 자의적으로 대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양태를 근거로 예의 명제를 한 번 더 번역할 수 있겠다. 그가 그의 ‘자아상’을 위협하는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기피하는 까닭은 그것이 <’본질’에 반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덕택인 것이다. 그리고 이 ‘본질’이란 것은 (노력 없는) 깨달음을 통해 그 자신만이 가까이 있는 까닭에 <증명할 수는 없으나> <상식>과 <윤리>의 근간이며, 또 바로 그것이 자연이 자연인 자연스러움의 뿌리인 까닭에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인격>에의 자격을 부여하는 그런 권리를 자기만이 지니고 있는 양태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 그의 ‘자아상’은 이제 그것이 세계만방의 ‘본질’인 까닭에, 그의 ‘자아상’에 반하면 그것은 ‘세계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는 그 ‘본질’을, 물론 언젠가 ‘논증’할 테지만 아직 밝히는 중이므로 ‘아직’ 논증되진 않은 방식으로, 고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저 <진실>이자 <본질>을 자기만 이미 깨닫고 있는 까닭에 아무에게도 그 근거를 증명할 필요도 없이 그 <본질>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고 또 누가 그걸 판단할 수 있는지 판단해 <자격증>을 발급할 수 있는 <공공기관>의 <위대한> 자리에 미리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의 ‘자아상’을 의심할 수 있게 할지도 모를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그토록 기피하는 까닭은, 자기만 알고 있으나 아무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바로 저 <본질>이 너무 위대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사고 자체가 너무도 불경해서가 아니던가. 거기 자랑스러운 <자기 숭배> 외에 무엇이 있겠나.

그러나, 사소한 반증이나 반례도 감당 못 하는 건 <진리>이기는커녕, <본질>도 <상식>도 <윤리>도 <자격>도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그저 수없이 떠들어지는 <응석> 중 하나에 불과하리라. 한 올의 <의심>도 감당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금지된 것이겠으므로. 그리 <사유>가 금지되고 <합리화>만 허용된 채 나부끼는 저기 저 <유사 논증 행위>들이 얼마나 <자격>을 따지고 <본질>을 따지고 <윤리>를 보다 열심히 따지고 있는지. 그런 <독재>국가를 역사 속에서 얼마나 익숙하게 살필 수 있겠는지. 어서 빨리 <메시지>를 스킵하고 <메신저>만 열심히 따지는 저 자랑스러운 니편 내편의 모습들을. ‘자아상’을 위협하지 않는 ‘의심’만 골라 수행하며 ‘자기 자아상을 의심하는 이미지’의 ‘자아상’을 연출하기 위해 극성인 채, 실은 ‘자아상’에 위협이 되는 ‘의심’은 한 치도 수행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저기 저 ‘유사 진리’의 멋들어진 사태들이 어찌나 자랑스러워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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