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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각은 언젠가 어느 날 소박한 목표라도 가져본 적이 있을 텐데. 그리 목표를 가정하는 순간 그 자신은 얼마간의 ‘단위’를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그리 가정된 과녁에 삶이라는 화살을 겨눈다. 그리하여 언젠가 어느 날 예의 과녁 또한 삶에 포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으리라.
소위 ‘성공’이라는 메타포가 우리 사회에서 무수한 과녁의 달성을 누적하고 있는 바와는 별개로, 우리가 이 ‘과녁’, 그러니까 ‘성공’, 혹은 ‘목표’를 가정하는 순간 우리 삶은 하나의 단위로써 [구체적으로] 쪼개어지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쨌거나 그 과녁에 다가가는 시도가 끝끝내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처음부터 그 과정과 완결을 합쳐 하나의 단위를 구성해 사고하고야 말았으므로. 성공이든 실패든, 그러니까 포기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이 단위를 거쳐 지나칠 수 있다(달리로는, 그리 영영 얽매일 수도 있다).
요는 이 과정이 다른 과정과 겹치기도 하고, 또 하나의 과정이 다시 무수한 과정과 완결로 나뉘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섣불리 지정하곤 하는 주체와 객체(대상)의 관계 양상처럼, 단위 또한 그저 임의적인 ‘개념’일 양인바. 그의 자아가 과연 지금 어디에 의탁하여 동일시하며 의기양양해하고 있는지에의 양상을 살피자면, 그처럼 필히 때마다 모순적일만치 일관성 없이 달라지는 양태들과도 같이, 예의 단위는 무얼 기준으로 이를 단위로 잘라 놓는가 하는 ‘움직이는 정의’에 의탁하고 있을 모양이다. 거기 더하여 예의 ‘움직이는 정의’ 또한 예의 단위가 구성하고 있는 ‘구조’에 의존하는 까닭에, (작동) ‘단위’는 (작동) ‘구조’에 필히 의존하고 있을 테지만, 그만치 ‘구조’ 또한 ‘단위’에 의존하여 거꾸로 정의되고 있을 터다.
그러므로 어떤 구조(Architecture)를 기획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이를 구성하는 단위(Unit)를 정의하는 일과 ‘벌써’ 마찬가지의 작업 아닐는지. 여기 이 두 가지 설계는 선후 없이 ‘아울러’ 일어나는 동시적 운동에 다름 아니겠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의 과정을 (정당화하는 게 [전혀] 아니라) 구성한다. 여기서 고려 대상은 [정당성] 아닌 [적합성]이다. 적합성은 부분과 전체의 상호성 여부에 그 성사 여부를 의탁한다. 부분이라는 임시 ‘개념’은 [전체]라는 [임시] 개념에 의탁해 [순간]적으로 구성되나 [연달아] 구성되고, 이 ([임시] 부분과 [임시] 전체) 상호 간의 질서는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요컨대 [지속]을 위해 [순간]이 모이는 것이지만, 작동(운동)의 측면에선 [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기실 순간을 가정하기 위해서는 작동(운동)을 제거해야 한다. 생물로 치자면 생명이 없어야만 [지속]없는 [순간]이 성립할 수 있는바. 그러나, 무생물(ex 돌덩이) 또한 (풍화되는) 시공간의 연속(지속) 중에[만] 놓일 수 있다).
작동을 캡처한 (예컨대 thread dump) 이미지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하는 건 캡처한 모양의 순간성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름다운지 따위가 아니라(물론, 아름다운지 판단하는 행위 또한 [순간]이 아닌 [지속]의 다발로서의 판단이겠지만), 어떤 작동의 와중에 예의 이미지가 등장했는지, 그러니까, 예의 이미지가 어떤 개념(object)들 간의 상호 작용 중에서 산출된 것인지에의 추론일 양이다. 임의의 (가령 혼탁한) 의도를 논파하는 작업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필연성으로서의 건조한 추론에[만] 의탁해야 하는 까닭도 거기 있다. 다소 모호한 판단일지언정, 판단이 그 자체로 유효하기 위해서는 예의 이 단위 구성을 뒤따를 수밖에 없어서다. 미래에 어떻게 변경될지 미리 가설로라도 열어놓고, 다소 구조가 복잡해질지언정 손쉽게 여타의 기능을 추가하기 쉽게 그 구조를 설계하는 일은 이미 동시적으로 단위의 정의에도 영향을 미치는 [의도]에의 기획으로서, 이미 건조한 필연성으로 구성된 설계인 까닭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유효한] 작동을 구성하기 위해 무수한 [설계]를, 가상을 전제로 한 ‘다시’ 가상에 비롯해서 연달아 ([지속]적으로) 결정한다. 각각의 유효한 설계를 순위 매기는 와중에 우리는 최우선 순위의 ‘필연성’(유일한 최선의 공식)을 발견할 수도 있겠으나, 앞선 가상이 확정되기 전 이를 전제로 뒤따를 다음 가상이 가정될 수야 없겠으니, 설령 최우선의 의사결정이 발견되지 못해 ‘필연성’이 여즉 구성되지 못할지언정 임의적으로서 선결된 가상(차악의 공식[들])이 미리 구성되고 기획되어 있을 수는 있다. 그처럼 임의적인 결정(commit)은 일종의 단단한 지반이 되(어야 하)지만, 추후 (임시) 전체 구조(Architecture)의 발전 와중에 수정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록(log)을 동반(해야 )하는 지반이 된다. 임의적인 확신(commit)은 무수한 분기의 평행우주(branch)를 가정하곤 하겠지만, 기실 매 결정은 어쨌거나 단 하나의 [절대] [유일] 구조와 그에 따르는 단위를 설정하며 쌓여 [임시] 전체(Flow)를 구성한다. 바로 여기서 [때마다 능동적으로 재구성되는] 개별 [전략적 확신(commit)]은 업무([임시] 전체 구조-현실)의 (임시) 단위에 다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단위는 구조를 가정한다. 그리 여느 거래(transaction)를 구성하며 어디서 어디까지 묶어 단위(부분)로 기획하는가 하는 건, 서비스(전체)의 어느 구간까지를 성공과 실패로 나눌지 판결하겠단 의미겠으므로, 임시 확신을 어찌 유효하게 설계해야 서비스가 ([임시]로라도) 의도하는 [유효성]이 성립되는가를 미리 가정한다.
가령, 서술하려는 역사를 무슨 단위로 끊어 놓고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건 역사 전반을 그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가 보던 역사 자체가 아닌 역사를 보는 그의 렌즈를 반증하여 누설한다. 고로, 그가 필연성을 어떤 개념으로 구성하고 있는지는, 그가 무얼 과정으로, 또 무얼 목적으로, 나아가 어떤 걸 중요한 것으로, 그리하여 과연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비용)으로 간주하는지 또한 [자동]으로 폭로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그가 무얼 주어로 보고 무얼 대상으로 보는지. 과연 어떤 [무능] 때문에 현실을 [가상]과 [현실]이 아닌 [상상]과 [현실]로 나누곤 그에 고착되어 변명만 찾는지 살필 수도 있을 양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유효성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지, 또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지, 그리하여 가상을 기반하여 현실을 바꾸는 게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여 [상상] 속에 안주하고 싶은지 늘상 [자동]으로 폭로되고 있을 것처럼.
예컨대 인증으로 치자면, 인증 객체(Object)를 인증 요청 객체와 인증 부여 객체로 나눌는지 그 여부에 대한 구상부터조차 일련의 인증 서비스 단위를 어떻게 구성할지를 미리부터 증명한다. 예의 서비스(Flow)는 ([헛된] 상상이 아닌 [유효성]에 대한 추론으로 산출된) 가상의 병렬 선택안 중 마침내 선택된 [단일] 객체[들]을 통해 순차적(일렬)으로 [흐른다]. 인증 순서를 지키는 서비스(임시 전체) 내에서 개별 작동(Flow) 각각은 순차적인 [유일] 구조를 구성할 수밖에 없겠으니.
단위가 [구조]의 구성에 의존하듯, [구조]는 단위에의 정의에 의존한다. 무수한 가정이 일종의 임시 확신(commit)으로 이루어진 전체 구조의 역사 내에서, 오류를 수정하는 건 현재 오류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결정한 당시 의사결정(임시 확신)을 추적(tracking)하여 관련된 필연성들을 다른 필연성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당시 병렬로 가정되었던 가상의 평행우주(branch)를 토대로 한 논의를 현재로 끌고 오는 일에 다름 아니다. 임시 확신(commit)을 다른 임시 확신으로 대체하고자, 그 당시 의사결정을 이룩했던 확신의 토대를 살피는 건, 결론만 다듬는 임시방편관 거리가 있는 작업이다. 요컨대 개별 의사결정에는, 제아무리 단순한 결정이더라도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들어있다. 가령 [현실] 도피를 위해 [상상]에 고착되어야 할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 인생을 바치는 작업 또한 그 누구보다 이데올로기적이겠으므로.
이처럼 서비스 역사 내에서 의도했던 이데올로기들 또한 작업 단위에 의존한다. 복잡한 작업 단위로 구성된 이데올로기는 수정 당시 고려할 요소가 너무 많아 수정이 불가능한 상태를 종용할 수도 있는바. 객체 지향의 객체가 최소 단위의 일transaction을 단위로 삼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제성을 은유하는 것은, 단위 그 자체가, 단숨에 완전한 서비스를 구성하는 망상이 아니라 언제나 수정을 해야 할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인 한계 위에서 그 모든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현실 원칙의 가상적 반영]일 따름인 까닭이다.
가령 근친상간의 금지를 예로 들 수 있을 텐데. 하나의 문명이나 소박한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 그 사회가 충분히 복잡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개별 단위가 충분히 단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친상간의 유전자적 결함은 오랜 기간의 역사 및 집단의 자성을 전제로 예의 [금지]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비현실적일 수 있으리라. 문명 혹은 사회 내에서의, 그러니까 최소 단위인 가족 내에서의 역할 단위가 복합적일 경우 당 집단이 마주한 상당히 복잡한 문제 해결을 위한 작업이 제곱으로 복잡해질 수 있다는 한에서, 한 사람이 가족 내에서 한 가지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는 객체지향의 논리에 의해 금지된 것은 아닐는지. 그러니까, 그녀와 그의 관계가 부부이며 남매일 경우 그러한 복잡한 관계가 집단 전체의 관리 및 작동에 위해가 되는 까닭에, 특정 양상에서 특정 역할은 하나만 적용되도록 규정되지 않았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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