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속 운영
실체가 있는 불안은 아마 불안이라기보다 ‘공포’에 가까울 것이다.
공포의 대상은 그 소실점이 뚜렷하다. 원근법을 따라 맺힌 초점을 전제로 나아가거나 후퇴할 수도 있겠으나, 소실점 너머의 세계도 분명 있으리라.
요컨대 불안은 그 과녁이 모호하다. 혹은 모호한 불안만 구별 지을 수 있을 양이다. 불안은 과녁 자체의 존재 여부만 따져도 무수한 과녁이 이미 즐비하게 길가에 늘어서 있는 상황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아직 과녁이 되지 못한 불안의 가능성(가령, 미래)조차 아울러 과녁 삼고 있을 테니.
예의 과녁이 지시하는 예외exception(불안)들 중엔 삶 전체server를 정지시키고 해당 예외를 처리하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종용하는 종류가 있고, 삶의 지속이 별도로 이루어지는 와중에 문제transaction를 동시에 고민하고 처리해도 되는 종류도 있겠다.
기실 삶이라는 문제 더미에서도 삶 전체를 정지시켜 해결을 전력으로 종용하는 전자의 예외는, 당사자가 그리 삶을 일시 중지하여 삶 자체를 해당 문제에만 전력으로 던져 넣어도 끝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일 적이 다수 아니던가. 저와 같이 치명적인 예외는, 불안(예외)이 번질 가능성조차도 뛰어넘어 적용되는 예외(불안)로서, 그 자신의 출처와 도달점을 구체적으로 지명하며 등장하고야 말지 않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차라리 전력을 다해야 하는 총체적인 일시 중지에 도달할 적에야 겨우 그 문제(불안)를 문제(예외)로나마 인식할 수조차 있곤 하지 않나. 말하자면 문제의 심각성을 연산할 적 쉬이 기준이 되는 건 그와 같이 유예할 수 있는지 여부 아니던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해결하지 않은 채로도 삶이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익숙한 불안(예외)을 무수히 방치한 채 지나치곤 하는 모양이다.
물론, 간혹 어떤 불안은 도리어 욕망을 유발하기도 한다. 불안을 즐기기도 하는 무슨 무슨 욕망(가령 혁명에의 그것처럼)은 저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 과정을 거듭 답습하기도 한다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당연히 모든 문제를 마침내 완벽히 해결할 수야 결코 없을 텐데. 기실 불안(예외)의 출발선 자체가 이미 당면한 문제뿐 아니라 당면할지도 모를 문제(예컨대, 미래)에 대한 대응을 미리 지시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불안에 관한 한 현재뿐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무한한 시간대와 공간대의 과녁을 끌어와 염두에 두도록 종용당하곤 하니까(가령, 남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판매하는 여느 상인으로부터 그러한 양).
자책의 외양을 하건 열등감의 외양을 하건 상관없이 이 불안은 과녁과 과녁 사이를 타넘으며 완전한 해결이 불가하다는 정황을 다시 당사자에게 폭로한다. 그가 설령 공포의 대상 하나를 그저 [순간] 해결하(였다 스스로 믿)더라도, 계속해서 대상을 연쇄하는 [지속]의 불안을 완전히 해결할 수야 결코 없을 양이므로. 기실 이 불가능이 가져오는 미증유의 절망이 있다. 완전한 해결이 불가하다는 소위 ‘불안(예외)’의 뿌리 깊고 거듭된 부활에 과연 우리는 그리 해결을 곧장 포기해야만 하는가?
작동(삶)을 따라다니는 예외(불안)에 관한 한 자기 자신(운영자)은 내부의 자기모순을 그 예외로서 다룰 수도 있겠고, 나아가 외부 환경에 대한 내부 작동의 부적절성을 그 예외로서 다룰 수도 있겠으나, 그에겐 그저 뒤바뀌는 환경에 대한 재적응 과정(지속)만 있을 뿐 완전한 적응의 완결(순간) 따위는 그저 [환각적 망상이자 허울]인 바와 같이, 예외가 완전히 사라진 작동(삶) 따위는 생산(도달) 불가능할지언정 그 불가능 위에서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작동(삶)을 [지속] 시도해야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과연 이 작동(삶)을 우리는 어떻게 시도해야 하는가? 그렇게 미증유의 불안에 대응하는 임의의 과녁이 있고, 언젠가 당 과녁에 도달하더라도 예의 ‘불안’은 사라지기는커녕 외양만 다른 새로운 과녁을 우리에게 매번 다시 폭로한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그 허망한 매 과녁을 매번 다시 쫓을 수밖에 없을 텐데. 우리는 그리 문제 하나를 해결하며 문제 둘을 다시 생산하는 거듭된 [순간]의 반복 속에서도 [지속]적 삶을 구가한다. 매 과녁을 내달리면서, 그 과녁이 가상의 궁극적인 과녁(의 [순간]이라는 헛된 망상)을 매달기 위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심 깨달으면서라도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내달려야만 하는 셈이다.
완벽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동시에 그 완벽한 해결을 추구해야 하는 이중의 부조리 위에서,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해결책을 디뎌 건너며 우리는 삶을 [지속]적으로 이어간다. 여기서 주요한 건 완벽한 해결의 망상 속 [순간] 따위가 아니라 그게 불가능함에도 이를 추구해야 하는 ‘부조리’와 그리 탄생한 무수한 ‘불완전한 해결책들’이라는 [지속] 자체겠다.
이를테면, 욕망을 절제하며 스스로의 정신과 신체를 돌보는 어떤 탁마의 와중에 저 흔한 실패(예외)를 마주하더라도, 좌절하며 포기한 후 다음번 시도로 해당 노력을 모조리 미루며 지금을 섣불리 놓고는 스스로 위로하며 (다급히 자아)[도취]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당장 고쳐가며 이탈한 긴장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영영) 이어가려는 어떤 끝나지 않는 태도가, 그러니까 계속해서 완전성에 흠집이 나더라도 결과에 관련 없이 매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이어 [수습]해 가며 삶(작동)을 끊임없이 재차 시도하는 그 [지속]의 (기본) 태도가 [오직] 하나의 [유일한] [작동]으로 [삶(작품)]을 그리 구성해 가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