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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exception

1. 작동과 불안

by 이채

돈이 그리 많지 않은 학생이 오랜만에 외식을 하려던 날, 본의 아니게 만 원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과연 그는 잃어버린 그 만원 때문에 외식을 취소할 것인가? 외식에의 취소 여부를 결정하는 건, 잃어버린 만원을 다루는 그의 심리적 현실이다. 과연 그는 만원에의 상실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어쩌면 그는 심리적인 회계를 다른 미래로 돌릴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른 미래에 사려고 했던 다른 물건(예컨대 신발)을 더 저렴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달리로는, 한 달 내에 사용하려고 했던 금액에 그 만원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애초에 계획을 세울 적에,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액수’와 ‘사용하고자 계획하는 액수’를 괴리시키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위해 얼마간 사용 가능한 금액을 남겨놓으려, 계획에서 얼마간의 금액을 배제하고, 잃어버린 만원의 심리적 위치를 이 계획 바깥으로 옮기는 식으로.

그처럼 예외를 가늠하는 건 그 자체로 계획을 가늠하는 일이기도 하다. 계획을 하면 가늠해야 할 예외가 생기겠지만, 계획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외 상황이 없다고 할 순 없다. 계획이 없는데 과연 무슨 기준에 대한 예외인가? 소위 통념, 혹은 일종의 임의적 상식선 내에서 우리는 우리 행동의 영향력을 가늠하는바, 이는 벌써부터 ‘계획’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를 가늠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통념을 가늠하기도 한다.

상실한 돈을 어느 지출에 배치할지, 혹은 지출 바깥에 배치할지 고민하는 건 매달의 가계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는 심리적일지언정 전체적인 돈의 흐름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현실적이다. 그가 매 상실을 어디에 배치하는가 하는 건 어디까지나 매번의 시간 선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패턴화된 그의 ‘일관성’ 자체가 구성하는 일종의 ‘가치관’은 동시적으로 그 순간의 선택에 붙박여 있다. 그리 얼마간 축적된 경험이 그에게 그 자신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 그러니까 통념을 거꾸로 지시하기도 한다(경로 의존성).

자기 행동 패턴에 대한 이 고정관념 혹은 통념은 자기 행동을 얼마간 스스로 거리를 두고 바라본 ‘판단’의 일종이다. 이 심리적 ‘판단’은 다음 ‘판단’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판단은 다른 판단과 얽혀 회로를 이룬다. 그와 같이 판단이 다른 판단과의 거래를 이루기도 전, 이미 여기서의 최초의 심리적 ‘판단’ 자체도 하나의 거래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거리를 두고 바라본 자기 자신에 대한 이 ‘판단’은 주체로서의 자신과 대상으로서의 자신 간의 ‘거래’를 지명한다.

이 거래의 단위는 ‘자아상’을 이루는 자기 자신에 대한 ‘통념’을 구성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념인 이 자아상은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규명한다. 우리는 이 ‘자아상’을 토대로 미래의 우리 행동을 예측하거나 계획하지만, 이 ‘자아상’ 자체는 미래를 향하고 있지 않다. 이 예측 혹은 계획은 우리의 ‘자아상’이 미래에도 바뀌지 않을 것을 전제 삼는 까닭이다.

우리 자아상이라는 이 커다란 단위는 ‘어떤 인풋에 어떤 아웃풋을 내놓을지’,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 무슨 판단을 내릴지’, 그러니까 ‘무수히 마주칠 외부와 우리의 내부가 어떤 관계를 맺을지’ 등에 대한 고정된 지시의 거래들, 그 거래의 다발들로 구성될 텐데.

우리가 우리의 자아상을 구성할 때 이미 우리는 얼마간 외부를 가정한다. 우리가 그 순간 알고 있는 최대의 경우의 수들에 우리 자아가 어떻게 반응할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시뮬레이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누가 저 모든 경우의 수들을 모조리 알 수 있겠는지. 우리가 모든 경우의 수를 알 수 없듯, 모든 외부를 알 수도 없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우리 자아가 어떠하길 바라기는 할 양인데. 그리 어떠하길 바란다는 건, 우리 자아가 자아 바깥의 외부와 어떻게 거래를 할지 그 방향성을 최소한 자기도 몰래라도 가늠하고 있다는 증거일 양이다.

말하자면 우리 자아의 최소 단위로서의 거래인 저 ‘판단’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보여주지만, 아울러 우리 자아가 어떠하기를 스스로 바라는지도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게 스스로 자아를 판단할 적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실상 그리 거리를 두는 까닭 또한 어느 기준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판단’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러한 판단의 기준은 관찰 이전에 들고 있을 수도 있고, 관찰 과정에서 생길 수도 있고, 관찰 이후에 회고적으로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덕택에 예의 기준이 전적으로 우리 자아 내부에 있다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 자체의 전제에서 어떤 기준에 과연 스스로 부합할지 못할지 가늠하고자 하는 미묘한 불안, 그러니까 이미 출발선부터 아로새겨져 있는 흉터를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판단한다지만,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판단하는가? 어째서 판단하는가? 이를테면 기준 없는 아름다움이 과연 하나의 판단인가? 기준이 없다는 건, 실상 기준에서 비롯되는 ‘틀릴’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판단을 부정하는 판단]이다. 기본적으로 판단은 애초부터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감추고 이를 부정하기 위해 더 정확한 판단을 희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곤 하나, 거기에 기준이 없다는 주장이 섞이면 ‘불안을 감추고 있다’는 판단의 기본 전제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다시’ 판단인 셈이다(불안이 있을까 불안하여 부정하고자 하는 이 불안에의 이중 부정 판단은, 이미 오직 [불안]만을 긍정하며 [기준] 삼는 판단인 셈이다).

무수한 기준, 당 기준들에 대한 [재차] 기준들, 저기 저 무한한 전제(뎁스)로 소급되는 기준들이 기어이 부정하고자 하는 예외의 축에는 미증유의 ‘불안’이 자리한다. 그와 같이 우리 자아는 우리 자신이 자기 ‘자아상’과 거리를 둘수록 어찌나 흔들릴 수밖에 없을는지. 그러나 끝끝내 우리는 이 ‘예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의 날씬한 자아상은 그 자신에게 무얼 지시하는가? 그의 부유한 자아상은 그 자신에게 무언가 지시한다. 그의 고상한 자아상은 그 자신에게 계속하여 핏발선 눈으로 지시하고 있다. 허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아상과 우리 자신 사이의 거리에 ‘직면’할수록 우리는 하나의 ‘예외’로 되떨어진다.

과연 자아상 안으로 파고들면 ‘불안’이 없(어질 수 있)겠나? 과연 거기선 예외가 없던가? 어째서 그토록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긍정되어야 하나? 우리 ‘자아상’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의존하지 않는 만큼, 그러니까 이 ‘자아상’ 자체의 기준이 외부에 있는 만큼 이미 기준이 왜곡된 것인가? 그러나 우리 ‘자아상’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미 그로 인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중이다. 우리 내면이 내면이라는 자체로 ‘굳이’ 존중되고 긍정될 근거가 없듯, 우리 ‘자아상’이 오로지 내면에 비롯하지 않았다고 ‘굳이’ 비하되고 부정될 근거도 없지 않나.

우리가 자기 자아상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전이든 후든, 우리는 이미 자기 자아상에 비롯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중이다. 심지어 예의 ‘자기 자아상에 대한 도덕적 판단’조차도 자기 ‘자아상’으로부터 비롯해 내린 판단 중 하나라는 아이러니에 짓눌려 있다. 고로 마침내 남겨지는 건 그저 과연 어떤 작동(자아상)이 무슨 예외(불안)를 떠안고 진행 중인가 하는 물음표 정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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