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정당성으로 치자면, 그리하여 관념적으로 자명한 '절대적' 정당성을 가정하고 추론하여 다다르고자 하는 시행착오의 '발달'에는 소위 '죄책감'과 '분노'의 발달이 아울러 포함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른바 자격지심이나 선민의식을 극복한 '절대적' 정당성을 추론하고자 하는 능력은, 죄책감을 포함하는 역지사지의 인식(추론) 능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여기서의 정당성은 '질투심'이나 '열등감',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등을 스스로 검열하고 고려한(극복하고자 하는) 정당성이겠으므로, 위와 같은 '자격지심'이나 '선민의식'을 반성하여 판단하는 달성 불가능한 노력을 그 뿌리로 삼을 터다. 따라서 '절대적' 정당성을 찾고자 희구하는 과정에서도, 감상적 호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닻은 다시 (달성 불가능할) (절대적) '정확성'(의 추구 여부)일 양이다.
이처럼 적확한 정당성을 위해서는, 상대의 상황에 당사자보다 더 과도하게 몰입하여 '이해' 이상으로 과잉 공감하는 건 도리어 걸림돌이리라. 다만 당 '이해'들을 무수하게 교차하도록 애써야 할 모양이다. 특정 상황에 과잉 공감하여 감상에 몰두하는 순간 정확성(가령 그게 대상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정확성'일지라도)은 벌써 흐려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확성은 누구에게도 이입하지 않고 대상을 하나의 '임의적인 타자'로써만 간주하는 능력, 그렇게 무엇과도 쉬이 동일시하지 않고 그 구조의 지형도를 이해하는 능력이리라. 또 그렇게 판단을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능력도 스스로를 '타자'로서 살피는 능력이겠다. 그처럼 자기 자신의 감상에 매몰되지 않는 능력, 그리하여 자기 '질투심'이나 '열등감' 등, 곧 '자격자심'을 극복하거나 자기 '선민의식'을 반성하는 능력 등은 타인에게 쉬이 이입하지 않은 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그렇게 타인의 호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호소에도 휩쓸리지 않고자 하는 훈련을, 우리는 어릴 적부터 '현실 인식'이라는 무늬 아래서 자기도 모르게 수행해 왔을 테니. 요는 도달했느냐 혹은 못 했느냐 등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을 해당 노력(발달)이 얼마나 진척되었느냐의 문제일 셈이고.
그렇게 질투심이나 열등감 등 본능적인 적개심이나 마찬가지로 적의에 찬 나약한 선민의식에 휩쓸리지 않은 판단 위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질투심'이나 '열등감'의 해소로서의 본능적인 '적개심'이나 '선민의식(가령 메시아 콤플렉스 등)' 따위가 아닌, 설령 도달 불가능할지라도 정확성에 기초한 '절대적' 정당성을 그 추구적 명분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소위 '분노'라는 명료한 개념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요컨대 '질투심'이나 '열등감', '선민의식' 등의 감상은 예의 명확한 개념으로서의 '분노'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해당 개념의 개인적 성립을 다만 방해하고 있을 테니.
자명한 개념을 토대로 한 개념으로서의 '분노'는, 정확성을 정당성(무조건적 주인공에 동일시하는 태도의 탈락 이후)까지 확장했다는 의미일 터다. 이는, 역지사지를 통한 모든 고려 대상의 성역 없는 평준화가 죄책감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당성의 전제인 까닭이다.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계는, 그저 본능적인 '적개심'이나 '선민의식' 덕택에 그저 '적개심(예컨대 피해의식 등)' 외에 제대로 된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한계와 동일한 원인을 가질 테니. 여기서 죄책감과 분노(이른바 발달에 성공한 적개심) 둘 모두의 근거가 되는 디딤대는 정확성을 기초로 한 '절대적' 정당성에의 추구 여부이며, 거듭 그 배역이 바뀌는 바로 옆 사람과의 반복되는 비교 의식에 기원한 유아적 경쟁 여부(자기애-나르시시즘)가 아닌, 추상적 가치관을 경험적으로 타진하여 쌓아 올리며 이를 위한 (종국에는 무한으로 번져야 할 이) 한계를 극복할 의지가 있어 왔고 또 앞으로 있을지의 여부(초자아)와 관련 있다.
허나 정확성이든 정당성이든 저기 저 '절대성'에는 누구도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을 요량이니. 이는 둘 모두 실로 그 출발점부터 주관의 영역인 까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정확성(현실 인식)을 설정하여 하염없이 접근하고 그 위에서만 정당성을 추구해야 나름의 유효성에 그나마 다가갈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