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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절대적 현실

시즌 1 PROJECTION

by 이채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지하는 게 우리 감각이 자기 한계만큼 지각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지각하는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각자 현실을 다르게 느낀다면 소위 절대적 현실은 그저 가설에 불과한가? 그렇게 세계에는 상대적인 현실뿐인가?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상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 절대적 현실을 각자 상대적으로 느낄 뿐일 테니. 요컨대 상대적인 건 우리네 개별 지각과 관념의 세계에 불과하지, 모두가 도달하고 사용하고자 방향 지어진 공통 세계 자체가 모조리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우리끼리 조차 소통할 수 없으리라. 절대적인 현실에 상대적으로 도달하고, 따라서 각자의 지각만큼만 현실을 느끼며, 각각이 그린 나름의 상상적 도식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는 한계를 가졌을 뿐이다.


가령 같은 정경 앞에서 우리가 보는 장면과 뱀이 보는 장면이 다르다고 해서 무엇이 가짜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허나, 이 뱀은 추상적 진실에는 다가설 수 없으리라. 우리는 우리 지각에서 공통된 바의 감지된 감각 외에 다른 걸 추출하고 추론해 낼 수 있다. 이른바 추상적인 도식이자 경험적인 가설이겠다. 우리는 절대적 현실에 도달할 수 없지만, 예의 추상적인 가설을 통해 그 현실을 가정하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는 있으니. 허나 이를 위해 우리가 도달하고 사용하는 현실이 매번 절대적일 필요는 없으나 필연적일 필요는 있다. 우리 정신의 상상이 끝내 추론으로 발달하려면, 고로 유효성(설령 그 유효성이 풍부한 상상력의 과시일지언정)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적 객관성에는 다다를 수 없더라도 필연성(가령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 상상까지도 이 필연성에 포함될 터다)을 바라보기는 해야 할 양이다.


이런 필연성은 인과관계와 함께한다. 무수한 저 인과들의 교차로에는 비유나 은유(여기서의 비유나 은유가 유효성의 원리가 아니라, 유효성의 원인이거나 결과라는 의미에서)로 다다를 수 없는 유효성이 있을 텐데, 가령 감동이라는 정서적 반응 또한 어느 인과(이를테면 유효한 비유나 은유가 원인이 되는 인과 등)의 결과이기도 하리라. 그렇게 일상의 사건들을 재차 귀납하고 연역하는 행위는 곧 필연성에 다다르고자 하는, 따라서 일상을 분석하여 개선하고자 하기도 하는, 나아가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실천 아니던가.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무수한 요소에서 필연성의 뼈대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우리네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끝나지 않을 노력인 동시에 절대적 현실에 도달하고자 영영 방향 지어진 시행착오겠다.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적 현실에 끝내 도달할 수 없겠으나, 개별 구체적 상황에 대한 유효성에는 도달할 수 있겠다. 또한 다수 유효성의 교차로에 있는 필연성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지 않겠나. 따라서 우리는 뱀의 시각이 우리의 시각보다 얼마나 풍요로운지 등 자의적 관념 기준에 근거한 우열을 '굳이' 나누는 게 아니라, 두 시각의 '차이'를 구별(인지/긍정)해야 하리라. 고로 어떤 차이가 어느 유효성과 관련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 감동과 다른 감동의 차이 또한 귀납하고 연역할 수 있을 터다.


귀납과 연역이라는 두 정신적 노력의 양식은 상호 의존적일 텐데. 연역으로 검증되지 못한(할) 가설이 귀납의 영역에서 그저 은유나 비유를 선고하는 데 그치듯, 귀납으로 설정되는 최초의 가설 없이 연역이 동작하기 요원한 까닭이다. 허나 노력의 두 양식은 유효성에 접근하고자 각 상황의 무수한 요소를 달리 자르고 종합한다는 점에서, 또 각자 필연성을 추론한다는 점에서, 마침내는 절대적 현실에 하염없이 다가서고자 바로 그 다가서려는 방식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검열적 관념 체계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우리는 늘 이토록 무수한 관념 체계 내부에 있을 모양이다. 그게 연역이든 비유든 귀납이든 은유든 간에, 문제는 그게 어떤 비유 무슨 은유이고 그래서 우리 정신이 이를 어떻게 활용하여 구조화하고 있는지, 비로소 그리 구조화된 우리 관념이 어디에 다다르고자 욕망하는지, 나아가 거기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이 성취되기 위하여 무슨 유효성이 필요한지겠다. 우리 관념이 일반(추상)적인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무수한 구체적인 것들을 거쳐야 하며, 그리 특수한 정신적 접근으로부터 마침내 일반 관념으로 되돌아 완성되기를 기대하며, 허나 그렇게 일반적 일상에서 분석을 거치면서도 끝내 실패할 완성을 영영 시도하며 그저 분석 자체를 하염없이 가공할 뿐이리라.


우리 최초의 거울상이 그저 우리가 되고자 하는 인물, 혹은 다만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데 그치는 인물(이미지) 따위였다면, 우리 최후의 거울상(거울상을 극복한 거울상-(초)자아를 극복한 (초)자아)은 저기 저 '절대적 현실'에 도달한 인물, 고로 이론적으로만 도달 가능한 인물(경험적으로 유효할 만큼 충분히 추상적인 개념)이어야 할 터다. 우리 노력은 분명 우리의 거울상과 아울러 현실화되곤 하나, 여기선 '현실'보다 '현실화 능력'이야말로 하나의 가능성이자 기량으로 작용할 요량이니까. 요컨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끝내 도달 불가능할 서로의 관념적 현실 또한 망연한 상상 아닌 정교한 추론이 가능할 테니까.


우리 각자의 저 상대적 관념 현실은 확실히 다만 주관적일 뿐 아니라 끝내 서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겠으나, 그렇게 구성되는 각각의 정신적 세계가 비록 상대적인 방식으로 구축되었더라도 구축된 정신 자체는 절대적으로 작동하고 있겠으므로, 연역과 귀납으로 서로의 도달 불가능할 세계를 '당연히' 하염없이 접근할 수는 있으며, 거기서 '필연성(유효성)'을 임상적으로 건져 올릴 수도 있으리라. 그 또한 어느 차원의 '절대적 현실' 중 하나인 까닭에, 그렇게 서로의 정신에 하염없이 접근하고 이를 위하여 분석하여 추론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의 관념 현실도 스스로 예의 '절대적 현실' 중 하나로써 접근하여 다룰 수도 있지 않겠나. 요컨대, 발달단계 중 어딘가 위치해 있는 우리 거울상 자체를 '절대적 현실(극복해야 할 중간 단계로서 기성 현실)'로써 다루는 건 분명 '절대적 현실'로써의 거울상 자체(도달해야 할 목표로서의 절대적 현실, 거울상을 극복한 거울상, (초)자아를 극복한 (초)자아 등)와 다르겠으나, 전자의 단계를 밟지 않고 후자로 접근할 수는 없을 모양이니까.


그리하여 소위 '자연스럽다'는 형용가정법의 '자연'에 관한 기호(소산적 자연)가 권력을 남용하여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가장 극단적인 욕망 아래 발산되고 있는 이상으로, '절대적 현실'로써의 '자연' 자체(능산적 자연)도 도달불가능한 목적지로서 거울상((초)자아)의 최종 목적지를 지목하고 있을 테니. 우리가 도달할 순 없으나 접근할 순 있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기량을 가공하여 단련할 수 있는 과녁으로서, '절대적 현실'은 매 시점에서 재차 고려되는 가능성이자 필연성이겠고. 그렇게 '절대적 현실' 자체에 다다르고자 하는 노력은 마침내 우리 자신의 '(초기) 거울상'이 실시간으로 변경(극복)되는 지점으로, 따라서 고착된 서로의 '거울상' 뿐 아니라 그렇게 실시간으로 변경되는 서로의 '거울상'까지도 자명하게 분석 가능한 지점(경험적으로 유효할 만큼의 충분한 추상화될 수 있을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어 각자의 개별 분석 능력 또한 다시 예의 도달 자체(자아를 극복한 자아)에 하염없이 접근하게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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