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자연스럽다는 문장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자연'스럽다'는 저 어휘 속에서도 이미 형용의 대상은 자연이 아니니까. 요컨대 사회적인 관계도를 '굳이' 자연에 비유하는 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인 관계도' 자체가 '자연'만큼이나 절대적이고 자명하여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반지성적 호소의 습관적 증상에 불과할 테니. 허나, 실제로는 그 자연조차 당연하지 않은 논의의 대상이자 탐구의 대상이다. '사회'는 그러한 과학적 탐구 대상은 아니나 그게 과학적 논증이 아니더라도 사회는 각자 나름의 논의 방식(나름의 논증 체계나 약속의 체계 등)이 있고 그로부터 도피한 동어반복이, 합의된 문명 체계 위에서 그렇게 논의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딱 그만큼 '굳이' 성숙한 태도와 어휘를 가장하여 카리스마 넘치게 호소하려는 어떤 권력의지들은 무슨 유효성도 소유하기 힘들고 또 힘들어야 할 요량이다.
돌아보면, '자연스럽다'는 저 형용사는 그토록 오랜 기간 남용되는 권력의 변명으로 활용되어 오지 않았나. 이를테면 '양반'은 양반다워야 하고 '노비'는 노비다워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어느 선비의 헛소리는, 그러므로 '산'이 산답고 '강'이 강다워야 하는 소위 '자연'의 이치에서 '애써' 근거를 찾고 있지 않던가. 여기서 작동하는 근거는 논증의 전제가 아니다. 논증 아닌 은유로써의 당 주장은 필연성을 결코 담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논의를 의도적으로 피해 간다. 기껏해야 결론의 '전달'만 시도할 뿐이다. 소위 권력 작용(남용)의 '이치'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저 뭉개고 지나가며 '관철'만 하고자 하는 저 태도의 뿌리에는, 설명 불가능한 동어반복의 모순된 욕망이 그저 '자연'스러움 자체로 부양되고 있지 않던가.
그리 덮어놓고 관철하고자 하는 대다수의 욕망은, 그렇게 논증에 실패하거나 또 논증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종종 통념에의 호소로 흘러든다. 그러한 통념은 너무나 자주 '다수결'의 이름을 도용하는데, 이를테면 4+4라는 과정이 투표를 통해 10이 되어버리는 현상과 유사한 결과물들이 얼마나 많이 목도되는지. 소위 자의적 공정성으로 '논증'을 대리하여 '정확성'을 의도적으로 폐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러니까 기묘한 열등감이 거기 있지 않나. 어느 분야건 '정당성'보다야 '정확성'이 우선 확인되어야, 차후 당 논리를 적용할 때 정당(공정)성 또한 고려될 수 있을 텐데. 그처럼 서글픈 감정의 영역에서조차 '정확'한 공감 혹은 '정확'한 포착이 차후 대응을 가능하게 할 모양인데도.
고로 '정확성'보다 '공정성'에 호소하는, 탐구의 절차적 '정확성'을 힘껏 배제한 뒤 결론의 호불호를 기준으로 민중이 투표하여 결정하는 민주적인 '지식'이라는 저 황당한 '이론' 혹은 '사실'들이, 그러니까 그토록 희한한 권력 남용의 '당연함'이라는 수단들이 얼마나 즐비하게 선포되어 왔던가 말이다.
자연스러움에 관한 담론은 어떤 이상(의도성 짙은 청사진)을 담보하기도 한다. 요컨대 인위적인 노력을 모조리 삭제하면 그 아래 순수한 천재가 살고 있으며, 고로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리 가정된 '신'적인 천재성을 무의식으로부터 스스로 끌어낼 수 있다는 신화가 그것이다. 어떤 면에서 무수한 종교들과 결부되기도 하는 이 경향성은, 끝끝내 노력에 대한 거부감이 혐오로까지 증식하였으나 이를 인정하기는 싫어 한껏 고상한 형용사로 당 혐오를 포장한 결과물일 뿐이리라. 설령 '신'적인 천재가 인위적인 번뇌 아래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태어난 그 순간부터 문화적으로 발육되는 오늘날 우리는 결코 거기 도달하지 못하고 또 못해야만 하도록 구성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거기 다다르고자 하는 환상은 실상 그 반대편에 있는 (소위 인위적인) 번뇌를 한 치도 직시하기 싫은, 그러므로 필연적인 노력의 사다리를 오르기 싫은 반작용(응석)으로서의 감상(말하자면 새로운 번뇌) 이상이 될 수 없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이미 존재하는 번뇌를 그저 없다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당 번뇌를 명징하게 확인하고 분석하여 고도화하는 방법뿐이리라. 번뇌가 없다고 하염없이 자기 최면을 시도해서는 나아갈 범위와 그 현실 도피에 따른 부작용만 그저 힘차게 명징할 양이니.
우리는 혹자를 '정확하게' 분석하고자 할 때조차, 당사자가 기분 나빠할지를 우선 고려해 가며 분석할 수 없어야 한다. 저 모든 요소보다 '정확성'이 먼저 판단되고 난 이후에 그 나머지가 다루어질 수 있어야 하겠으므로. 요컨대 그가 불쾌할지를 고려하는 순간은, 정확한 분석 이후에 당 결과를 전달할지 말지, 전달한다면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순간이어야 할 테니까. 상담으로 말하자면, 상담 자체는 분석 이후에야 맞이하는 상황이며 분석을 토대로 해야 하는 대응이겠다. 그게 어떤 사태든지 간에 사태에 대한 정확한 분석 이후에야, 분석된 사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정당성 혹은 공정성에 대해 재차 그에 맞는 '정확성'을 토대로 분석할 수 있겠으니. 그러므로, 언제나 주요한 건 때마다의 적합한 종류의 '정확성'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