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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표현의 문제

시즌 2 SIGN

by 이채

가령 현실의 ‘상대성’과 ‘절대성’ 각각을 그저 ‘정신적 요소’와 ‘물리적 요소’에 맞아떨어지게 대응시킬 수는 결코 없으리라. 예컨대 3+3=6이라는 관념적 절대성(진실)을 정신의 그 어떤 기제로 설명하더라도, 그리하여 당사자가 예의 ‘연산’이 세상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투사projection)하든 이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역투사―내사)하든 간에, 이 연산(원리)은 정신적 기제이기 이전에 이미 ‘절대적 현실’일 테니까. 말하자면, 물리적 현실만큼이나 정신(관념)적 현실에 또한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적인 요소(필연의 뿌리―진실)가 분명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테니.

사회적 관계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가령 우리가 여느 다양한 개별 인간관계에서 피어나는 어떤 의무를 ‘최선’을 다해 지키고자 할 때조차, 그러므로 책임을 다하고자 애를 쓸 때조차, 우리가 우리의 어떤 결핍 때문에 이 사회적 약속을 내사(역투사) 중이라 간주하여 가정한 스스로의 방어기제인 ‘노력’을 검열하여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굳이' 복잡하게 꼬인 과잉 심리분석의 콩트는 과연 간헐적인 웃음을 얼마나 유발할 수 있을는지(그렇게 과잉 적용된 이론이 관객 각자에게 개별 유머 감각의 취향을 상기하게 할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그와 아울러, 마치 중력의 작용으로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논증’을 두고, ‘중력’이라는 이론을 내사(자기화)하여 세상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반론 아닌 반론을 시도하며 ‘어른스럽게’ 시대를 개탄하고 지성을 걱정하는 여느 논객의 형용사로 덧칠된 유머 감각을 살펴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어떤 “사적인” 인간관계에도 나름의 책임이 필히 따르고, 그리하여 당사자가 예의 ‘절대성’ 여부, 그러니까 “진실” 여부에 관심을 두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정신 기제는 소위 ‘투사’나 ‘내사’ 이전에 “죄책감”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투사나 내사는 기본적으로 현실(진실/정확성/죄책감/우연/삶)에서 도피하기 위해 현실 인식을 환각으로 대체하려는 기제니까.

누군가 ‘진실’과 ‘책임’과 ‘죄책감’을 그 나름대로 어떻게 해석하든, 소위 이야기되는 ‘(절대적) 진실’은 논증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터다. 그 논증의 방식이 꼭 인과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떤 효과를 축으로 검토되는 구체적 과정에 대해 익숙하다(물건을 잃어버릴 적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귀납적으로 검토하기도 한다). 우리가 논쟁(내사된 기제를 통한 이념적 역할 놀이의 승패) 아닌 논의(이를테면 감정의 진실에 대해서조차 감정적인 노이즈 없이 그 자체의 현상적 진실을 타진하는 토의)를 해야 하는 이유도, 말의 승패에서 비롯되는 우열 의식보다 그 효과로서 더 나아지는 삶에 있지 아니하던가 말이다. 그 효과에 비롯되는 합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논증을 하던지 간에 예의 논증은 그 자체로 지성의 유일한 표현 양식일 수밖에 없을 터다. 어쩌면 무한히 많은 논증(표현) 양식 중 우리가 사용하거나 알고 있는 건 몇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예의 논의에의 참여는 이 ‘표현’ 능력의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일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예의 논의에 참여하기 위한 입장권은 얼마나 잘 논증할 수 있느냐 등의 논증 능력의 정도가 아니라 과연 (절대적) ‘진실(필연성)’에 관심이 있느냐로 귀결될 터다. 이 (절대적) ‘진실’에의 관심 여부를 사회적으로 해석하면, 욕망의 발산(예컨대 꿈을 꾸거나 주목받고자 하는 경향성) 이전에 ‘책임(인간관계 내부 필연적 의무―가령 사소한 폐라도 끼치지 않고자 하는 태도―의지)’에 대한 ‘감수성’이 있느냐라고, 나아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느냐라고 주석을 달 수도 있겠다. 요컨대 ‘(서로의 관념 세계에 대한 절대적 진실을 포함한) 진실’에 관심 없는 상호 간 의사소통(역할 놀이)은 애초에 각자 정해진 대사만 읊고 끝이 날 테니. 서로가 서로의 말의 최소 유효성도 전달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어진 대사들은, 의사소통이라기보다 자의적 기호의 상호 간 발산(혹은 전형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유아적 승패의 자의적 동어반복―착취)에 가까울 테니까. 또한 죄책감을 느낄 수 없는 단계의 아이는 바로 해당 발달단계(죄책감이나 정확성이 필요 없도록 가정된, 내사나 투사와 같은 '환각적 상태')로 모든 관계나 이론(철학)을 '굳이' 환원해서 논의 아닌 논쟁(역할 놀이)을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을 양이니.

이를테면 가면만 있는 소위 충분히 상대적인 현실 세계에서조차, 그렇게 소위 절대적 현실과 양립 중인 가면 외엔 무엇도 없는 현실(진실) 위에서조차, 그리하여 진실에의 관심은 모두가 그렇듯 끝끝내 (절대적)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현실(진실)을 인식하고자 애를 쓰는 도정 중에 있음을 증명하는 일차적인 ‘표현(증거)’이다. 고로, 그가 유아였을 적 진실에 다가서던 최초의 기제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리하여 현재 현실을 인식하고자 하기까지 밟아왔던 발달단계의 각 방어기제로 이루어진 징검다리가 어떠했든 간에, 그는 예의 진실에의 관심(죄책감)을 통해 자기 내면(마음)부터 외부(인간관계) 현실까지 아우르는 진실을 찾아 늘 재차 (회복을 포함하여) 발달하는 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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