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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의 구조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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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처음 읽을 적과 이후 반복해서 읽을 적의 감각은 얼마간의 괴리가 있다. 우리는 처음 가는 길에서는 ‘연역’을 하고 추론을 한다.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 당장 주어진 길은 무엇이 있고, 처음 출발지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마침내 도달해야 할 좌표로부터는 얼마나 또 떨어져 있는가 하면서. 한편, 갔던 길을 다시 갈 때는 어떠한가? 과연 이 모든 연역 과정을 반복하는가? 당장,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어느 길로 갔었는지 기억해 내고자 하지 않던가. 그처럼 매번 연역할 순 없다. 연산은 바로 이 기억과 합치된다. 덧셈을 추리하기 위해 매번 정수를 증명하던가. 단지 정수를 기억해 낼 뿐. 과연 누가 곱셈의 답을 찾을 때마다 곱의 개수만큼 덧셈을 반복하던가. 다만 ‘구구단’을 외우지 않던가 말이다.

두 번째부터는 반복이며, 그러므로 얼마간의 확신을 담보한다. 첫 번째의 갈증이 없는 대신에 일종의 능숙함이 자리를 대체한다. 이를테면, 과거로 회귀한 그는 미래를 안다. 그가 아는 미래는, 기실 그의 출신 시간으로 보자면 ‘과거’다. 그는 ‘과거’를 다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시 사는 이 ‘과거’ 시간 속에서는, 첫 번째 삶의 많은 것들이 그저 요소로 전락한다. ‘목소리’는 ‘문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기실 그가 언젠가 어느 날 맛봤던 맛집의 감동은, 바로 그 맛집을 찾아냈다는 감동과 바로 그 맛집에서 느낀 낯선 맛의 조화가 아니었던가? 당시 그의 ‘경험’에서 그 맛은 하나의 목적이었다. 그것이 수단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며, 그런 까닭에 그 ‘맛집’은 하나의 수단으로서 연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사는 그에게 바로 그 ‘맛집’은 하나의 연산 가능한 요소일 뿐 아니겠나?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가정한다면, 두 번째 삶부터 삶의 무수한 요소들은 그 자체 경험의 대상이기보다 연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가 <겪었던> 유년부터 이제 고민하는 것은 어떤 직업이 ‘의미 있는가’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미래 ‘구조’에 어떤 행동과 결정을 ‘배치’했을 때 ‘구체적으로’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따위 아니겠나? 여기 이 두 관점의 간극에, 소위 ‘인간성’이라는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될 미사여구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으리라.

피아노를 수십 번 반복해 연습하는 이에게, 그러므로 건반 하나의 자리가 정확한지를 고민하는 따위가 아니라 여러 건반의 순서와 리듬, 그 배치를 고민해야 하는 이에게 건반 하나의 의미는, 그러니까 음표 하나의 의미는, 태어나서 음표를 처음 본 혹자가 느끼는 건반이나 음표와는 완연히 다를 양이다. 그는 이미 여느 궤도를 이루는 컨텍스트 위에 있는 것이겠으므로.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행위에서, 혹은 한 번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 행위에서, 또는 한 번 살았던 삶을 다시 사는 가설에서 우리는 개별 사건 자체가 아닌 그 위의 맥락을 점차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훈련은, 저수준의 개별 동작들을 자동화하여 고수준의 의사결정만 신경 쓰게 하는 것 아니겠나? 피아니스트가 애드리브를 할 적에, 건반 하나하나의 정확도는 더 이상 고민할 거리가 아니라 당연한 무엇일 뿐이다.

이미 아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다시 반복하면, 각 인물의 희로애락 그 자체보다도 그 인물들이 미끄러지는 맥락이 더 선연해지지 않겠나. 그리하여 어떤 문장은 앞선 문장을 반박하지만, 기실 곧장 다시 반박당하며 저자가 하고자 했던 최초의 주장을 궁극적으로 더 강화하기 위한 제물이란 걸 우리는 컨텍스트 위에서 그토록 익숙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반복은 우리에게 ‘구조’를 보게 한다. 오직 ‘낯섦’을 탈락시키는 방법으로 작동하는 이 ‘반복’은 기실 완전한 의미의 반복은 아니다. 반복할수록 다른 종류의 인식(그것이 지루할지언정)을 가져오는 고로, 그것은 ‘반복되지 않는 반복’에 다름 아니다.

반복은 전혀 반복될 수 없는 숙련도를 낳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숙련도는 사용자에게 ‘자유’를 준다. 그런 의미에서 온갖 다양한 응용 범위로써의 이 ‘자유’는 획득되는 것이리라. 반복은 처음 낯설었던 무엇을 탈락시킨다. 그리고 수단으로 만든다. 예기치 않았던 것은 연산될 수 없고 그 자체 목적이 될 수밖에 없겠으므로, 여기 이 반복의 숙련은 ‘목적’을 탈락시키고 이를 ‘도구’로 탈바꿈시킨다.

처음 어떤 업무에 적응할 적 그 낯섦으로 인해 그 업무 배후에 곧장 있는 ‘컨텍스트’라는 목적을 이해하는 데 애를 먹을 수 있다. 허나, 그 일이 충분히 반복되어 예의 컨텍스트가 지루하고 익숙한 무엇으로 탈바꿈된다면, 그제서야 예의 ‘목적’ 또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난다. 더 머나먼 컨텍스트로 다가갈수록 더 지루해질 것인가? 그건 나아가 봐야 할 문제이리라. 어쨌거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자유가 드높아질수록 우리는 저 무수한 수단들을 더 능숙하게 다루고, 목적은 그만치 훨씬 더 유예되어 멀어지지 않겠나.

온갖 컨텍스트들을 뒤섞는 작업은, 그처럼 무수히 해석하고 그 해석을 다시 해석하는 작업은 끝끝내 모든 목적을 수단으로 바꿔 궁극적인 목적을 유예시키는 작업에 필히 따르는 현상일 터다. 그가 무얼 ‘열어 밝히’든, 그 열어 밝히려는 의도 따위가 그 자신의 어떤 트라우마 때문인지, 사회적 억압 때문인지, 얄팍한 자아상 때문인지, 그리고 그 자아상 따위가 어떤 사회 구조적 효과 때문인지, 또 그 사회 구조적 효과는 또 이전 어떤 사건 때문인지.

가령, 사회(군중)는 과연 어떤 사람을 ‘천재’라고 ‘증상’적으로 정의 내리고 싶어 하는지, 누구를 ‘위대하다’고 ‘증상’적으로 정의 내리고 싶어 하는지, 그래서 기실 ‘천재’의 신화를 보존하고자 하는 까닭이 그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고 싶은 덕택이라면 과연 그 내적 증상의 원흉은 무엇인지. 말하자면, 관객의 편파성에 전혀 의지하지 않는 위대한 개인 따위는 없으리라. 후세의 누군가가 ‘위대하다’고 간주하는 경우에, 그 누군가에 대해서만 그는 위대한 것이다. 위대하다는 개념이든 천재라는 이미지 따위든, 이는 이를 평가하는 혹자에게 전적으로 의탁한 파편적이고 기생적인 무엇 아니겠나.

이처럼 <흔한 형용사>들은 그토록 쉬이 저 ‘구조’를 은폐하고, 저 ‘구조’의 일각을, 바로 저 빙산의 일각을 (궁극적인) 목적인 양 (물론 너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면서) 호도하고는 한다. 너무 아름다운 문학이라고? 어떤 퇴행을 자극하는 문학이길래 그토록 아름다운 문학일는지 두고 볼 일이다. 말문이 막히는 퇴행을 형용사로 아름답게 틀어막는 일, 그 자체가 흉물스러운 대상이 되기 직전에 낚아채어 찬양하는 형용사로 미리 덕지덕지 말문을 막는 정신적 독재에의 나약하고 다급한 시도는 언제나 ‘구조’적으로 두고두고 다시 폭로되어야 할 터다.

거듭된 반복 속에서 구조는 계속 다시 태어나고, 그렇게 본의 아니게 점차 선명해지는 누설들은 하나하나 낱낱이 매번의 폭로로 다시 다루어야 할 터다. 그런 와중에도 목적은 그렇게 끝도 없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목적 자체는 유예된다. 우리는 매 컨텍스트를 ‘이해’할수록, 이전에 ‘목적’으로 간주했던 것이 다만 ‘수단’에 불과했다는 바로 그 텅 빈 간극 위에서, 새로이 등장한 바로 그 ‘수단’이 지시하는 ‘목적’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므로, 그토록 유예되는 목적과 수단의 이 재귀함수는, 경험 너머의 반환 값을 ‘선험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하는바. 그리 목적은 사라지는 모양으로, 목적들은 <오직> <순차적으로> 수단이 되는 방식으로만 사라지는 모양이다. 여기 중요한 건, 끝끝내 목적지는 모조리 사라지고 저리 모든 게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당연함 따위가 아니라, 결코 이 순차적인 순서가 <도착>적으로 뒤집어질 수 없다는 한계일 테다. 그러므로 그 무슨 깨달음도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어떤 도달점도 연역의 당연한 순서를 뒤집으며 사선으로 다다를 수 없을 양인 모양으로. 소위 저 구조는 연역의 논리에 기초할 테니. 그것이 설령 은유를 포함할지언정, 그 또한 연역의 전제로서만 그러할 터다. 거기서 위장과 전치 또한 연역의 어느 단위에 다름 아닐 테니. 이를테면 무얼 위한 위장이고 무엇에 의한 전치며, 그리하여 위장과 전치는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와 같이.

동어반복이라는 목적이 목적을 부르는 헛소리들이 모조리 폭로되어 마침내 모든 목적이 모조리 사라진 자리, 거기 남는 건 다음과 같으리라. 잔여하는 수단들이 어떤 <순차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 또 관찰자가 단번에 모든 수단을 아우르는 구조를 인식할 수 없다면, 관찰 가능한 매 단위 구조는 과연 무슨 수단을 그 임시 목적(이른바 임의적인 본질)으로 간주하여 때마다 어떤 구조를 구현해 이루고 있는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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